1964년~1969년
지금도 눈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풍경....
시유지인 야산을 집도 절도 없는 인민들이 무단점거(?)하여 산비탈을 깎고 축대를 쌓아 지은 무허가 판자촌... 요즘 말로 달동네였는데 우리집은 능선에서 두 번째 아랫줄에 자리를 잡았다. 일곱 살박이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까지 줄줄이 4남2녀를 거느린 실직가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라. 돌이켜보면 이 일이 내가 태어난 이래 아버지께서 남기신 최고의 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사갔을 때는 보로꼬(block) 벽돌로 지은 본채(방 하나 부엌 하나)뿐이었던 것 같은데 일단 짐을 부려놓고 살면서 오른쪽에 한 칸, 나중에 왼쪽에 한칸 늘려 지었다.
나중에 지은 두 칸방은 진흙을 이겨 벽을 올리고 바닥은 대패질도 제대로 안 된 송판(아마 철거현장에서 주워오지 않았을까?) 깔고 지붕은 루삥이라고 불리는 콜타르를 입힌 종이로 덮었다. 이 지붕은 작은 막대기를 서까래 삼아 못질로 고정시킨 매우 허술한 것이라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면 휘딱 날아가 하늘이 보이곤 했다. (바람 부는 날 날아간 지붕조각을 찾으러 돌아다닌 얘기를 일기에 썼다가 잘 쓴 일기로 뽑혀 상을 받기도 했다는....)
처음엔 방 하나에 여덟식구가 살았으니 (정확히 말하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들 둘이 나가 살았으니 여섯 식구) 그 식구가 좁은 방에서 같이 복닥거리려면 사면 벽에 돌아가면서 시렁을 매어 짐을 모두 올려야 했다. (시렁을 매어야 하는 사정은 그 후 10년 정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훗날 번듯한 집에 번듯한 가구를 들이시고 나서도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시렁을 매려고 하셔서 자식들의 제지를 받곤 하셨다)
다음 해에 방을 한 칸 더 늘린 것은 둘째오빠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쓰던 온돌방이라도 세를 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지은 방들은 구들을 놓을 만한 여력이 없어 앞서 말한 것처럼 그저 비바람이나 막고 흙바닥이나 면한 집이었기 때문에 연탄난로 하나에 의지하여 네 번의 겨울을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당시의 어린 내가 어른이 된 지금의 나보다 훨씬 인내심이 강했던 것일까?
꺽다리 총각과 콩알 만한 아가씨 내외에게 그 따뜻한 방을 내준 그해 겨울 밤, 등골로 스며드는 추위를 잊으려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안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이튿날 아침이면 쌩쌩하게 일어나 기활좋게 학교에 가곤 했다. 감기로 고생했던 기억도 별로 없고.... 참 건강한 어린이였나보다.
그 꺽다리 아저씨는 다방에서 은단을 팔았고 콩알만한 아줌마는 종일 뜨끈한 구들장을 지고 잠만 잤다. 그래도 신혼이 달콤했던지 일년 살고 비운 방 벽에 곳곳마다 볼펜으로 장미꽃 그림과 “영원히 사랑해요” 등등의 낙서를 남겨 우리집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ㅎㅎ
그 다음 해, 입주 가정교사 혹은 군입대 등으로 나가 살던 오빠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오게 되자 왼쪽에 다시 방을 하나 더 들였고, 이 방에는 세 오빠들의 장서(?)가 발디딜 틈도 없이 꽂혔다. 그 방에서 하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한국단편문학을 읽고 또 읽고.... 문학잡지 같은 것도 열심히 읽었는데, 때꺼리도 없는 집에 어떻게 그렇게 책이 많았는지 지금도 신기하다.
집 옆에 작은 개울이 흘렀고 큰 돌 하나를 깔아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 이삼십 보 가면 땅속으로 드럼통을 묻고 긴 송판을 걸쳐 발디딤을 만든 뒤 사방을 가린 척만 한 화장실이 있다. 겨울만 되면 쌓인 자리에 고깔모자처럼 또 쌓인 것이 단단하게 얼어 똥구멍을 찌르려고 덤빈다. 어린 나이에 무섭지도 않았을까?
윗집은 아버지가 목수일을 하는, 우리 막내오빠와 이름이 같은 아이네 집이었고, 화장실 가는 길목 빈터는 천막을 치고 호떡장사 하는 경자네가 살았고, 아랫집에는 사춘기 아들이 둘 있는 *년네가 살았다.
그 집도 단칸방에 다 큰 아들 둘을 데리고 있기가 좀 거시기했는지 어느날 열여덟 살쯤 된 큰아들이 우리 집과 그 집 축대 사이에 터를 닦고 루삥으로 삼각뿔 천막집을 지어 거기 기거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동네 불량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사시사철 웃통을 벗고 다녀 깨벗쟁이(전라도 사투리)라 불리던 청년도 있었는데(내 소꿉친구 무숙이 오빠인 듯) 엄마는 그 별명이 상스럽다고 꼭 거먹돌이라고 불렀다. 얼굴이 오이처럼 걀쭉한 배씨댁과 뚱땡이네라고 불리던 새댁도 생각난다.
멀리 보이는 양계장집은 우리 언니를 사모하여 아침마다 등굣길을 지키던 철이 오빠네... 교회로 넘어가는 길목의 고개에는 당수장가게(무슨 뜻인지?)....
지대가 높아서 이 모든 이웃들의 집과 함께, 국궁터였던 활터와 수도집(여기서 돈을 내고 물을 길어다먹었다), 동사무소를 거쳐 시내로 내려가는 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었던 전망좋은 우리 집... 지금도 약도를 그리면 다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억 속에 선연한 우리 동네... 그곳이 주민등록 등본 주소록이 뒷장까지 꽉 차고도 넘치도록 이사를 다녔던 우리집의 화려한 이사 이력 중 가장 오래 산 기록을 남긴 천연동 산4번지였다.
'그 시절에(~2011) > 花樣年華'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을 이기는 힘-2 (0) | 2004.11.04 |
---|---|
가난을 이기는 힘-1 (0) | 2004.11.04 |
가난은 아이를 조숙하게 만든다 (0) | 2004.10.29 |
자서전이나 써볼까 합니다 (0) | 2004.10.29 |
추억 속의 엽기 선생님들 (0) | 200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