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루의 전망이 침침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출장으로 새벽밥 챙기느라 잠을 설쳤다. 소파에 머리를 대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아홉시가 넘었다. 수영강습 놓친 내 기분은 무거운 구름을 두르고 잔뜩 찌푸린 하늘과 비슷했다.
꿀꿀한 기분과 오늘 놓친 운동량을 만회하려고 아침 먹고 뒷산엘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점심을 먹고는 요며칠 밀어뒀던 아르바이트꺼리를 오늘은 빡세게 밀어낼 요량이었다.
헌데 일 시작하기 전에 습관처럼 들러보는 블러그에서 단 한 개의 단어에 꽂혀 뻘짓을 하고
머리에서 김이 솟으니 일은 손에 안 잡히지...애꿎은 게임만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오래 전에 일하던 여성단체의 창립 20주년 기념 콘서트인데 기금마련 행사의 성격이기 때문에 물경 10만원짜리 표 두 장을 의무적으로 배당(!)받고, 원래는 남편과 함께 가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출장으로 펑크가 나서 평소 신세가 많은 선배언니와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해뒀던 거다.
헌데.... 컴퓨터 앞에서 정신 팔다가 안 그래도 외출준비가 늦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상 현관을 나서려니 전자키가 말썽이다. 전지를 교체해달란다. 예전부터 앵앵거릴 때 미리 갈아뒀어야 하는 건데.... 집에 있는 건전지로는 모자라 급히 동네 수퍼로 뛰어가 간신히 건전지를 교체하고 나온 시간이 여섯시 십오 분....약속은 여섯시 오십분이고 공연은 일곱시다. 차 막히는 시간인데... 클났다.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고....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았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상습 정체지역인 남부순환도로 낙성대 구간이 그다지 막히질 않는다. 공연에 늦지는 않겠군.... 한숨을 쉬며 언니가 먼저 와 있나 전화해보려고 백 속에 손을 넣는 순간....머릿속이 하얘진다.
공연 표를 안 가져온 것이다.
솔직이 패티킴 공연 안 봐도 크게 여한은 없지만, 머리털 나고 처음 사본 나름 고가의 티켓이 너무 아까워 기사 아저씨에게 집 쪽으로 차머리를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언니는 이 약속 때문에 다른 약속도 취소했다잖는가.
그러나 이를 어쩌나. 그런대로 소통이 되는 가는 길과는 달리 유턴 후의 차선에는 차들이 꼭꼭 들어차 굼벵이처럼 기고 있다. 언니와 통화하는 것을 들은 아저씨 말씀이.... 디너쇼는 먼저 식사를 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아마 여덟시나 되어야 공연 시작할 꺼란다. 그럼 아저씨, 어서어서 달려주세요....
미련스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십 분 가까이 택시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내리고 말았다. 공돈 일만 오천원만 날리고 만 셈이다.
"언니, 나 치매...... 미안한데 우리 밥이나 먹자."
꿀꿀한 기분을 소주 한 잔으로 씻어버리고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먼저 도착해 있다.
그런데 하시는 말쌈이...아침에 광명역 앞에서 접촉사고가 났단다. 시비를 가려야 하는데 KTX 시간이 바빠 보험처리 했으니 내일 차 키 가지러 오면 내어주란다.
머피의 법칙이 철저하게 관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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