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탄 중빠(트루판에는 자전거나 경운기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어 호텔이나 여행사의 투어버스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승합차 하나를 전세 냈음)는 불기둥이 솟구치는 원유개발 현장과 풍력발전용 바람개비들이 늘어선 사막을 2시간 30분 가량 달린다.
참고로 승합차 요금 : 우루무치에서 트루판까지 1킬로당 4원씩 계산한다는데(왕복 600킬로) 우리는 다음날 천지 갈 때도 사용하기로 하고 그냥 하루 도는 데 천 원 하기로 협상. 이 외에도 고속도로비가 왕복 100원 가량, 관광지마다 주차비가 5원가량 소요되었다. 물론 기사에게 점심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베이징 시각으로 오전 9시에 떠났다가 다섯 군데를 간신히 돌고 오후 9시경 돌아왔다
삭막한 고원지대가 다 지나니 눈 앞에 갑자기 한 폭의 유화가 펼쳐진다. 진한 초록빛 포도나무숲과 붉은 량팡(凉房-- 붉은 황토벽돌을 하나씩 엇갈리게 쌓아 구멍이 숭숭 뚫리도록 지은 포도 말리는 헛간), 이 배경에 꼭 어울리는 깊은 눈매를 가진 사람들이 나귀나 경운기를 타고 지나가며 이방인의 버스를 쳐다본다. 초록의 도시(綠州) 투루판에 도착한 것이다.
첫 도착지는 카얼징(坎兒井).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양제의 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공사로 꼽히는 지하수로로 길이가 1천 킬로에 달한다는데, 당시에 뚫었던 구멍만도 천 개라고 하며 이 수로에 잇대어 현재도 사막에 물 대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 달디단 생명의 물이 투루판 전역에 연초록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터널을 만들어 투루판 인민들을 먹여살리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 속을 이리저리 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버스는 2000여 년 전의 세상 지아오허꾸청(交河古城)으로 데려다준다.
교하고성은 기원전 250년에 이란계 서역인에 의해 건국되어 기원 450년까지 7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차사왕국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43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성 안에 번성기에는 인구 6천500명이 살았다는데,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오랜 세월 전쟁과 비바람에 부서지고 깎인 진흙 구조물의 흔적뿐이다.
한때는 관아였고 제단이었고 우물이었고 부엌이었을 땅굴과 토담들, 그리고 아직까지도 위풍당당하게 남아 있는 대도(大道)... 뙤약볕 아래 잠들어 있는 폐허의 도시는 우리의 시계를 잠시 이천 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전망대에 올라가 정적에 잠긴 고성 터를 굽어보니 마치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골고다 언덕 같기도 하다. 신비스러운 그 언덕에서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지열이 45도가 넘는 살인적 더위만 아니라면 하루종일 머물러도 좋았을 텐데....
점심도 잊고 서둘러서 보았지만 시계는 어느새 베이징 시각으로 세 시를 넘기고 있다.
갈 길은 멀고 해는 기우니 아쉽지만 까오창꾸청은 교하고성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스타나꾸무(阿斯塔那古墓)는 유물과 미라가 대부분 박물관으로 옮겨졌다는 이유를 들어 건너뛰기로 하고, 쑤꿍타(蘇公塔)와 훠옌산(火焰山)에서 기념사진을 위해 잠시 섰다가 뽀쯔커리커 치엔포똥(柏孜克里克 千佛洞)으로 향한다.
며칠 후면 개통된다는 포장도로를 옆에 두고 30분 가량 우회하는데 이 길의 풍경이 또 일품이다. 아무리 달려도 싫증나지 않는 포도나무 가로수길이 끝나면 서부영화에 나옴직한 거친 바위사막길이다.
화염산 뒤쪽에 위치한 이 석굴은 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원나라 때까지 계속 축조되었다는데 원래의 83개 중 40여 개만 남아 있다. 아름다운 벽화가 많기로 유명했다던데 명대 이후 이슬람 교도들에 의한 훼손과 외국 탐험대의 도굴로 볼 만한 벽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섭섭했다.
천불동이 내게 남긴 인상은 실제 유적인 석굴 안의 모습보다, 불타는 사막 산허리에 이슬람식 외양으로 치장한 석굴의 세팅 자체인 것 같다.
빠뜨릴 수 없는 일 한 가지. 천불동 앞에는 낙타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진 찍는 데 3원"이라는 말에 절대 속지 말고 쳐다보지도 마시라. 이 말에 속아 낙타에 오르면 낙타잡이 위구르 소년들이 무조건 고삐를 이끌어 한 바퀴 돌리고 100원 내라고 한다.
여기서 시비가 붙으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 위구르족이 순식간에 몇십 명씩 몰려들기 때문이다. 특히 한족으로 오인할 경우 뼈도 못 추릴 수 있다. 차 안에 늘 강도퇴치용 곤봉을 가지고 다니는 덩치 좋은 우리 기사 아저씨도 고함을 치며 합세해주었지만 위구르족이 계속 몰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통사정하며 오십 원을 준 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에게 막무가내 바가지 씌우는 것은 미웠지만 마치 독립운동이나 하는 듯 비장한 얼굴로 차앞을 가로막던 어린 소년들의 얼굴은 웬지 내 마음에 아프게 들어와 박혔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푸타오거우(葡萄溝)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될 걸 그랬다.
포도 철에 태어나 포도의 여왕임을 자처하고 있는 나는 포도구에 가면 葡萄溝 속으로 다이빙하여 취할 때까지 먹으리라고 단단히 별렀는데, 이럴 수가! 아직 포도 익을 철이 이르지 않아 시큼한 조생종만 조금 맛보고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8월부터 12월까지 포도를 수확한다고 함). 포도구 안에는 포도박물관과 위구르족 민속관이 손님을 부르고 있지만 아무 것도 나의 실망을 달래주지 못했다.
우루무치에 도착한 시간은 베이징 시각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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