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동창이 '조선비치호텔 2박3일 무료숙박권'이 생겼는데 남편은 너무 바빠 해당사항이 없으니 너라도 끌고가련다고 날짜 좀 잡아보란다. '그래, 언제 한번 바닷바람 쐬자' 해놓고는 반 년이 지나가버렸는데 지난주 다시 전화가 왔다. 유효기간이 9월 30일까지인데 이거 못 쓰게 되면 네 책임이란다. ^^
마침 내게도 공짜는 아니지만 공짜 비슷한 게 있었다. KTX 50% 할인권 네 장.... 둘이 왕복하면 딱이다.
게다가 전화를 받은 시점이 질질 끌던 중남미 여행기를 탈고(!)하던 날 오후였다. 새로 산 카메라도 시운전을 기다리고 있고....
이렇게 '공짜컨셉'으로 시작된 여행이라서, 이왕이면 배낭여행 행각을 특급호텔 숙박과 접목시키고
어찌보면 뻔해질 게 뻔한 여행이라도 '20대의 탐험' 모드를 첨가하여 신선감을 배가해볼 속셈으로
우리는 배낭을 지고 길을 떠났다.
1. 부산 지하철
9시 54분에 떠난 KTX는 12시 25분에 우리를 부산 역으로 데려다주었다.
여기서 질문! 왜 KTX는 개찰구가 열려 있을까? 사람도 기계도 표 보자고 안 한다.
객실 내에서도 검표 안 하고.... 실험삼아 무임승차 한번 해볼까?
우리 나라도 독일처럼 승객들의 양식을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쁜 일이고....
부산 역에 내려 지하철로 다른 동창이 기다리는 광안역까지 갔다.
서면에서 환승했는데 환승구간이 신기할 정도로 짧았다.
내가 부산에서 지하철을 타본 게 1987년이었던가? 88년?
아무튼 1호선이 개통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이용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3호선까지 생겼고 또 어느 구간인가 공사중이라고 한다. 서울지하철에 비하면야 구간도 짧고 노선도 단순하지만 비좁은 구도로들이 많은 부산에서는 교통체증을 덜어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겠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오면 편하겠지만, 오가는 시간 아낀다고 배낭 넣어둘 사물함을 찾았는데....
이게 좀 불편하다. 동전으로 10개를 넣으라니.... 주변에 동전교환기도 없어서 매점까지 걸어가 물 한 병 샀다.
100원 주화 하나 넣었다가 도로 빼는 대형마트 시스템에 익숙해진 터라 잠깐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10,000원대 이상을 지출할 대형마트 이용고객들에 대한 서비스와 1000원대의 지하철 이용하는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에 차이를 두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동전 열 개를 하염없이 투입하고 있자니....)
부산 지하철에서는 금융기관의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교통카드를 사야 하는데....
겨우 2박3일 머물면서 교통카드를 사기가 좀 그래서 오랜만에 종이티켓을 일일이 끊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오잉, 지하철 일일권이 있네?
버스 약간 택시는 더 약간.... 주로 지하철에 의지해서 움직였던 우리는 이 티켓을 200% 사용했다.
서울엔 이런 게 왜 없을까? 헌데 부산엔 왜 이런 게 있을까?
부산엔 외지사람들이 서울보다 더 많은 걸까?
2. 호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처음은 아니다. 중국에 살 때야 소위 '비즈니스'라는 필요 때문에 대접을 하든지 받든지 호텔 출입이 여삿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야 그럴 일이 있겠는가. 윤기나게 놀러간다고 해봐야 펜션 아니면 콘도 아니면 모텔.... 호텔 숙박이 처음이라 호기심이 발동, 최대한 뻔뻔하게 탐색전을 벌이리라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체크인을 마치는 순간부터 (요즘 유행어로) 촌발 날리며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 호텔에 장수돌침대와 같은 수의 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덤불내외와 쌀여사도 묵어간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팻말을 붙여놓은 데다가, 객실도 보통 객실이냐, presidencial 다음가는 executive.... 1박에 45만 원이라니 2박이면 90만원,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란 말이다. 안 찍을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동행이 배짱과 유머감각을 겸비한 친구라 나의 이 촌티 행각은 저지당하지도 구박받지도 않았다.
객실로 들어가니 TV 초기화면이 우리를 맞아준다. 옴마야! 야가 우리 온 걸 우째 알았다니?
우아한 소파와 최고 재질의 침구, 푹신한 가운... 도 좋았지만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컴퓨터...(길 떠나선 좀 잊으면 좋으련만, 중독이다. ㅋㅋ)
그리고 해변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통창이었다.
냉장고와 스낵칸 외에 이런 칸도 있었다. 맨 위쪽은 아마도 금고가 아닐까 싶다.
무늬만 이그지큐티브인 우리는 이 세 칸에 손도 대지 않았다. 혹시 한 달 용돈이 날아갈까봐서... ㅋ
9층 고객들만을 위한 라운지가 별도로 있는데.... 서비스가 기가 막히다.
세련되고 풍부한 아침 식사 서비스야 기본이지만 낮 시간에는 과일과 음료를, 오후 시간에는 조금 더 푸짐한 스낵이 고급 알콜류와 함께 서비스된다.
이왕 일류호텔에서의 배낭행각을 시작한 이상 이 찬스를 절대 놓칠 우리가 아니지...
반식 다이어트의 생활화를 지향하는 우리가 생각보다 푸짐한 스낵을 저녁으로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카드 크기의 샌드위치도 두 개씩, 집게 한 번이면 될 샐러드도 두 집게씩, 맥주 안주용으로 조리된 패주볶음도 두 번씩 듬뿍.... ^^
외지에 나가 있으면 식사비의 압박도 숙박비 못지 않은데 아침저녁 식사를 여기서 해결하고 점심은 현지 동창들에게 얻어먹고... ㅋㅋ 아마 머리카락이 좀 빠졌을 것이다.
얘야 인물도 되고 복장도 단정하니 이 럭셔리풍에 비슷하게 어울린다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늠름하게 등산복장을 하고 추리닝 바지에 희미한 얼룩흔적이 여기저기 돋보이는... 그야말로 집에서 마루 닦을 때 걸치는 복장을 편하게 입을 옷이라고 가져갔는데....
숙박 이튿날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식사 시간에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 복장 그대로, 맨발에 실내화 걸친 채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바로 옆에서 하는 아침식사를 뭐..,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던 거지) 라운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넥타이에 정장 재킷까지 챙겨 입고 있었다. 아이고 이 민망!
아무리 얼굴 두꺼운 나지만 때와 장소를 못 가린 죄값을 하느라고 음식을 마음껏 푸지도 못하고 추리닝임이 역력한 바지 옆선의 두 줄이 민망하여 가능한 출입을 적게 하려니 두 번 가지러 가기도 신경쓰여 살짝 굶주리고 말았다. 마지막날 아침에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추리닝을 단벌 청바지로 바꿔입은 뒤 보무도 당당하게 라운지를 누비며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즐겼다는.... ^^
이 호텔이 선사한 즐거움 또 하나. 수영장과 사우나의 무료이용...
저녁 늦은시간에는 이 좋은 수영장을 이용하는 이가 없어 우리 둘이 야호를 외치며 완전히 전세 냈는데
떠나던 날 아침에 내려와보니 연세 지긋하신 언니들이 강사의 지도에 따라 아쿠아로빅을 하고 있었다.
투숙객들은 아닌 것 같고.... 호텔에 딸린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외부 회원들인 모양이다.
언니들의 눈총을 무시하고 촌발 날리며 오늘도 촬영모드에 돌입.... ^^
수영 하다 말고 아쿠아로빅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
어쭈구리! 제법 배경에 어울리는데?
그래, 이제 넌 대한민국 2%에 껴도 되겠다. ㅋㅋ
바다를 내려다보며 즐기는 해수 사우나도 훌륭, 꽃미남 코치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헬쓰도 훌륭..
이 훌륭한 시설들을 이용하는 회비는 얼마 정도 될까?
호텔의 밤사진에서도 드러나듯 불 켜진 객실 수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로비나 라운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조차 90%는 외국인 내지 고국에 다니러 온 재외동포 같았다. 하긴 이런 호텔을 자기 집 드나들 듯 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몇 %나 되겠나..
그래서 1층 레스토랑에 세운 연주자들도 외국인인가? 일자리 필요한 훌륭한 한국인 연주자들도 많을 텐데,
외국인들이라면 오히려 현지인 연주자들의 연주를 더 듣고 싶어할 텐데 왜?
3. 사용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버는 사람들이 돈을 써주는 게 미덕이다.
또한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 노하우를 연구하는 가운데서 문화라는 게 발전해간다.
문제는 돈도 안 벌면서 쓰는 사람들이다.
돈을 쓰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애타게 소망하는 나머지.... 내 것의 생기를 말려죽이는 사람들이다.
맞아, 이런 인간들이 문제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시겠지만, 사실 이런 문제적 인간들이 따로 있는가?
그 경계선은 미묘하고도 흐릿하며 너와 내가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구분일 뿐이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화두처럼 문득 떠오른다. 일반적인 쓰임새와 다른 뉴앙스로....
주머니 사정 헤아려가며 애타게 물질적인 질(대부분의 경우 '부티')을 추구하는 것은, 편안한 수준을 선택하여 주인답게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삶의 질과 자존감을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물질만능 사회에서 화려한 외양(量)만 추구하는 동안 오히려 속삶의 質은 누더기로 변해버리는 것 아닐까?
럭셔리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천골이라 그렇다면 할말 없지만...
그러나 평생 성골로 살아와 사회적으로는 맹인이나 다름없는 무지한 이들, 뒤늦게 돈푼 좀 쥐고 성골에 합류하기 위해 기를 쓰는 사람들, 사람을 판단하는 데 물질적인 것 외에 다른 기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가난하게 자라고 빠듯하게 살아온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못말리는 구세대....
이제 와서 새삼스런 얘기지만,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한국 사회가 그동안 정말 많이 변했다.
전사회적으로 물질숭배가 얼마나 노골적이고 지독한지.... 정나미가 떨어져 나도 깐돌이님처럼 반대로 달려볼까 싶은 마음이 솟구치기도 한다. 그러나 봐라, 단 이틀 특급서비스에 푹 빠져버린 나....
얄궂은 세상이다. 내 것 남의 것 구분할 줄 아는 어른도 이러할진대 자라는 아이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호텔에서 잘 놀고 잘 잤으면 자랑자랑이나 하고 말것이지 왜 삼천포로 빠져서 뒷말이 이리 많은고,
확실히 난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 준비가 아직 안 된.... 완고한 인간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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