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국내

2008 단풍놀이

張萬玉 2008. 11. 10. 08:53

일전에 친구랑 용문사에 들렀을 때 가을이 충분히 익지 않아 '2주 후에 뵙겠습니다'.... 기약했는데

http://blog.daum.net/corrymagic/13676025 어느새 2주가 후딱 지나가고 있었다.  

노세 노세 언제 노나, 메뚜기도 한 철인데 놀 수 있을 때 놀아줘야지.

단풍은 아직도 무르익은 것 같지 않지만 달력의 숫자는 이미 제철의 끝을 고하니 떠나려면 지금이다.

 

단풍도 단풍이지만 오랜만에 달려보고 싶었다. 기름값 아낀다고 단단히 묶어뒀던 애마에 간만에 채찍을 휘둘러 뻥 뚫린 고속도로를 씽씽 달려보고 싶었고 한적한 국도도 느긋하게 누벼보고 싶었다. 

목적지는 내장산.

단풍은 내장산 단풍이라고들 하는데도 아직 가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그 산 아래 가을바람님이 계신다.

이주하셨단 소식은 들었지만 아직 인사도 닦지 못했고 하룻밤 얻어잘까 하는 속셈도 있었고... 겸사겸사..^^  

사당역에서 친구를 픽업해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천안IC에서 25번 고속도로로 바꿔타고 정읍 IC까지 내처 달렸다. 내장산 단풍객 때문에 붐빌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도로가 텅텅 비었다.

 

정읍 시내로 들어오니 오른쪽에 하천을 낀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반긴다. 길 이름이 뭐였더라?

지금도 아름답지만 가로수가 벚나무이니 벚꽃 피는 계절엔 완전 환상이겠다.

가을바람님의 보금자리는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도 네비게이션이 끝까지 책임 못 지는 산자락...

허술한 농가지만 멋지게 꾸며내시는 가을바람님 솜씨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함박웃음으로 맞아주시는 언니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블러그 글만 보고 타향에서 외로이 지내시느라고 심신이 쇠약해지신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예전보다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듯하다.

  

문터골에서, 강화도에서, 필리핀 바기오에서 보았던 정다운 소품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http://blog.daum.net/corrymagic/10030746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는 언니를 보면 게을러터진 내가 부끄러워져서 땅속으로 잦아들고만 싶다. ^^

 

손님들을 위해 빈 터에 평상도 짜놓으셨다. 국수 한솥 삶는 건 일도 아니신 듯... 

 

오랫동안 비워 낡고 망가진 집을 말끔하게 고쳐놓으셨다. 심심할 틈도 없으시다니 정말 다행이다.  

 

말씀은 쉽게쉽게 하셔도 어디 농촌살이가 녹녹하기만 할까. 

 

진순아, 너라도 엄마를 잘 지켜다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차량이 출동한 김에 부안에 가자신다. 교통이 불편해서 한번도 못가보셨단다.

곰소항에 들러 올해 김장에 쓸 젓갈도 좀 사고 채석강에서 석양을 보자고 서둘러 일어났다.

 

곰소 가는 길에 내소사에 잠깐 들렀다. 

들어가는 길의 침엽수림.. 십 몇년 전 새겨진 내소사의 기억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에 가을이 드니... 그윽하군.

 

 

소박하고 정갈한 옛느낌. 사찰이 아무리 융성해도... 절집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도 단풍이 한창이다.

 

 짧지만 아름다운 단풍터널

 

 종일 날이 흐려서 그랬는지 해도 생각보다 일찍 기울었다.

곰소항에 들러 젓갈 몇 가지 챙기고 나니 어느새  어둑어둑....

 

 채석강 노을은 물건너 갔지만... 그래도 갔다.

 

그리고 찍었다. 왔, 봤, 찍! ㅋㅋ 

 

이튿날 아침

자, 이제 본격적으로 내장산 단풍놀이 시작해보세. 

내장산 단풍놀이의 대명사 단풍터널.

매표소부터 내장사 일주문에 이르는 3킬로 구간인데 단풍열차도 다니고 무료 셔틀버스도 다닌다.

 

역시 단풍은 내장산 단풍.... 다른 곳 가보고 또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헉, 노란 단풍이다...! 

 

 

단풍터널 구간 중간에 있는 호수.  다 좋은데 성의없이 지은 정자가 옥의 티. 

  

일주문 오른쪽으로 빠져 백련암을 향해 올라가는 길. 기분좋게 땀 날 정도의 경사길이다.

 

내장산을 헤매자면 하루도 모자라지만 오늘 오후에 올라갈 예정이라  

백련암 - 서래봉 - 불출봉 - 원적암 - 내장사의 반나절 코스를 돌 생각이었는데(3시간 반 코스),

아무리 '혼자서도 잘 노니 염려 말고 다녀오라'고는 하셨어도 가을바람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실 것 같아 

두 봉우리는 생략하고 백련암에서 원적암으로 난 오솔길을 걷기로 했다.

 

백련암.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서래봉이다.

 

 

 

 

 

원적암을 지나 내장사로 내려가는 길목에 비자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독약이지만 약으로도 쓰이는 비자. 사람의 성격에도 그런 구석이 있을 것이다. 다스리기에 달렸다.

 

내장사 담장에 내려앉은 노란 가을  

 

용문사에서 벌였던 뿌리기 행각 재연. 물론 촬영감독의 요구에 못이겨... ㅋㅋ 

 

그리고 이런 행각도... 역시 촬영감독의 강요에 의해...

얜 인물이 되니 초상권 같은 건 물고늘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

 

혼자 다니면 경치만 찍게 되는데 같이 다니니 쓸만한 배경 속에 꼭 내가 들어가게 된다.   

이럴 때 인물에 자신없는 자는 카메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주는 지혜를.. ㅋ

 

 

  

서래봉을 포기하는 바람에 전망이 궁금해 결국 케이블카를 타고 말았다. 케이블카는 신선봉으로 올라간다.

시간이 충분하면 여기서 산행을 시작해도 좋으련만.... 휘리릭 내려와야 했다.

 

주렁주렁 열린 감 하나 못 따보고.... 이제 우리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탄다.

언니, 덕분에 잘 놀다 가요~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홍성 IC 부근에는 과거의 '동지'이자 훌륭한 인생선배가 운영하는 씨알목장이 있다.

 

돼지농장으로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을 모두 겪어낸 끝에 이제는 100두가 넘는 청정 한우목장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한우펀드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여 지금은 동네 축산농가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의미있는 사업에 더 큰 힘을 기울이고 있다.  http://cafe.daum.net/malpro/CGSS/6

이 목장에서 생산하는 청정 육우들은 '한우예찬'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생협과 자체매장, 인터넷을 통해 팔려나가는데 미국 쇠고기 수입파동 덕분(!)에 안전한 쇠고기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 매출이 오히려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http://www.crmart.co.kr/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내 평생 이런 귀한 장면을 다 만나게 되다니.... 

어느새 청년이 다 되어버린 이 집 맏아들(http://blog.daum.net/corrymagic/7206135)이 열심히 새생명 탄생의 순간을 촬영하고 있었다. (소는 앞발부터 나온단다.)

 

앞발만 나온 채로 한참을 쉬고 있더니 순식간에 쑴풍~ 오, 순산이다!

 

어미소가 양수를 핥아줘야 하는데 웬일인지 딴청만 부린다.

태내 분비물이 호홉기를 막을 수도 있기 때문에 쥔장이 나섰다.     

 

십수 년의 고생 끝에 지은 근사하게 집. 이웃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작년에 들렀을 때 없던 별채가 지어져 본채와 복도로 연결이 되었고 그 가운데 작은 호수가 생겨났다.

원래 설계에는 있었는데 예산부족으로 1년을 미뤄뒀단다. 

 

손님용으로 지은 별채 내부. 30여 명 정도 앉을 만한 큰 거실에 주방과 화장실이 갖춰져 있고

계단으로 연결된 침실 천장에는 하늘로 난 창이 뚫려 있어 누우면 별이 보인다.

한쪽벽에는 생협 조합원 교육용인지?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쥔장 아드님의 감독데뷔 첫작품을 감상했다. 생태학교 영화교실에서 배운 솜씨로 찍은 '송아지 탈출기'....

작년 대한민국 청소년영화제에서 장려상에 입상한 작품인데 주연으로는 감독의 친구녀석과 씨알목장의 송아지가 출연했고 조연으로는 몹시 멋적은 아빠가 등장하셨다. 짧고 소박하지만 송아지의 탈출을 통해 나름대로 '자유'의 의미를 부각시킨 귀여운 작품이었다. ㅎㅎㅎ     

 

우리가 자고 갈 줄 알고 손님방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쥔장님...

 

그러나 갈길이 먼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먹던 쇠고기보다 더 훌륭한 '한우예찬'의 차돌백이와 등심을 배가 터지게 얻어먹고 (역쉬 목장을 찾아온 보람이... ^^)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고속도로로 올라서야 했다.

사당역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반... 

거기서 전철 타고 다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친구는 남편으로부터 '당신 책상 뺐다'는 전화를 받았단다. ㅎㅎ

이틀 연속 밟아댔더니 시방 오른쪽 무릎이 안 구부러진다.

짧았지만 단풍빛으로 붉게 타올랐던 2008년 단풍놀이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