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이번으로 세 번째다.
1991년 11월, 어느 단체의 단합대회에 끼어 백무동 계곡으로 올라가 장터목에서 자고 새벽에 천왕봉에 올랐던 게 첫번째였다. 그때 내 나이 서른 넷, 그때도 힘들다곤 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코펠과 부식이 든 배낭을 걸머지고 주로 20대 후반이었던 젊은 청년들 틈에 끼어 그만하면 잘도 올랐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발 아래에서 백마떼처럼 힘차게 달려가던 구름떼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어.
그리고 1996년 여름엔 남편의 짧은 여름휴가를 몽땅 투자, 2박3일간 지리산 종주에 나섰지. 그때 아들네미는 중1이었고.... (그러고 보니 이번에 동행했던 정호군 - 이름 맞나? - 또래였구나)
노고단에 차를 두고 대피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새벽 세 시에 길을 떠났지.
첫날 벽소령까지 갔어야 하는데 큰 비를 만나 연하천 산장 부근에 텐트를 쳤고 둘쨋날 부지런을 떨었으나 역시 큰 비가 발목을 잡아 세석산장에서 점심을 먹고서야 천왕봉에 오를 수 있었지. 결국 달음질하다시피 백무동으로 내려왔지만 마을을 1, 2킬로 앞두고 다시 산속에 텐트를 쳐야 했고 불어난 계곡물을 피하느라고 날밤을 샜고.... 이튿날 남편이 노고단으로 가서 차를 가져와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는 우리처럼 내일 출근해야 하는 급한 차량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 갓길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는 밤새 달린 끝에 영동고속도로 신갈 분기점에서 보았던 동 터오는 하늘....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군.
서론이 길어졌네. 아무튼 두 번의 지리산행은 내 가슴에 평생 품고 갈 그리움을 남겼어. 그 넓고 푸근한 어머니 지리산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적잖이 험상궂었던 경험들이 이제 내 약해진 무릎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겁을 줬거든.
그러던 차에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후배로부터 지리산 둘레길 도보여행 얘기를 듣게 된 거지.
하루에 10킬로씩 이틀을 걷는다고 하데. 경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200~3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숲길과 마을길을 따라 걷는다는 거야. 반가운 마음에 덜컥 같이 가겠다고 약속을 했지.
떠난 날은 5월 2일과 3일. 다른 집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금쪽같은 연휴일 테지만 머리 굵은 아들넘은 말할 것도 없고 졸업논문 준비에 정신 팔린 남편도 내가 알아서 혼자 놀아주면 감사해 할 터. 국 끓여놓고 나물 무쳐놓고 생선 재어놨고.... 떠났지.
막상 떠나는 날 비가 온다고 하니까 간사한 마음이 또 망설여지데. 산길이 비에 젖으면 진흙길이 되는데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버팅기다 보면 무릎에 무리가 올 텐데.... 하하, 이건 완전히 신경증적인 엄살이지. 아무리 둘레길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지리산이라는 이름에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던가봐.
우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버스는 떠났어. 이제 사진 보여줄께.
헛, 첫 사진이 떡 사진! ㅋㅋㅋ
아침 굶었겠다고 나눠준 떡이 어찌나 맛이 있는지....
새벽에 배달되어 아직도 뜨끈하고 쫄깃한 대추설기의 진한 향기는 떡집 전화번호까지 찍어두게 만들었다.
서대문 영천시장에 있는 떡집에서 만들었단다.
지리산 속에서 1박2일을 함께할 팀이니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는데, 초중등 자녀를 데리고 온 4인가족이 세 팀, 한 자녀 데리고 온 가족이 한 팀, 부부 커플이 두 팀, 골드미스 친구커플 한 팀, 혼자 온 건 나 하나. ㅜ.ㅜ 그러나 산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다운 소탈한 분위기에 마음이 푸근해지더군.
버스는 45인승인데 사장님이자 가이드를 맡은 후배와 기사아저씨까지 24명밖에 안 탔다. 오붓하긴 한데 괜히 내가 미안타. ^^
시청앞에서 7시 30분에 출발했는데 경부고속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엔 텅텅 비는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까지 차간거리 2미터... 기사 아저씨 속좀 타셨겠다. 버스전용도로조차 이 황금연휴에는 아무 쓸모가 없더군.
교통정체는 장수 - 함양 간 고속도로에 올라와서야 겨우 풀렸다.
인월 IC에서 나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인월요업 도자기역사전시관이라는 곳에서 차를 세우길래 아무리 아이들을 동반한 여행이라지만 견학부터 하나? 했더니... 목적지는 전시관 옆에 있는 산채부페였다.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함유한 '제대로 산골음식'이었다. 6000원짜리라는데 훌륭했다.
인월면에 있는 지리산길 안내센터에 잠깐 들러 걷기구간에 대한 안내팸플릿과 지도를 챙겼다.
동서울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여기까지 닿는다니 개별적으로 오는 사람들은 둘레길 걷기의 들머리를 이곳으로 잡는다는데 우리는 대절버스가 있으니 산길 구간이 시작되는 매동마을로 이동한다.
매동마을 회관 앞에서 썬크림 발라가며 산행 준비 중.. ^^
국제미남 천재군, 영국에서 놀러온 피터/선옥씨 커플.... 피부관리하느라 바쁘시군요. ^^
매동마을 뒷산으로 난 임도가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의 들머리. 약간 가파르다.. 헉,헉!
산 중턱에서 바라본 매동마을. 산기슭의 고추밭과 고사리밭에선 싱싱하게 자란 녀석들이 손길을 부르지만...
절대 꺾으시면 아니되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11킬로 떨어진 금계마을. 우리는 빨간 화살표를 따라가면 되고 금계마을에서 오는 사람들은 검은 화살표를 따라오면 된다. 사실 이정표가 없어도 길은 외길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별로 없어보인다.
저게 무슨봉, 저게 무슨봉... 산사나이들은 혹시 알려나?
모르는 나는 그냥 구름에 홀려 걷는다.
혹시 내리막길에서 도움이 될까 하여 튼튼한 나무가지를 하나 주워 짚고 가는데 너무 길어서 무겁다.
마침 톱질을 하고 계신 아저씨를 발견, 좀 잘라달라고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다랑이 논 풍경이 아름다운 상황마을 입구였다.
논을 가로지르는 길이 없으니 논둑길을 따라 걷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금세 진흙탕으로 변한 논둑길...
좁지, 미끄럽지, 비바람은 불어대지...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쪽은 물댄 논.... 스릴 만점이다. ㅎㅎㅎ
그래도 이런 근사한 풍경 앞에서 무슨 불평이 있을손가.
저 비옷... 중국 살면서 아들넘이 자전거 탈 때 걸치던 건데 한국 와서 처음 걸쳐본다.
미끄러운 길, 엉덩방아 안 찧고 무사히 내려왔으니 축하해야쟤. 자, 지리산 동동주 한잔씩들 혀!
아름다운 창원마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었는데 비가 몹시 쏟아진다.
카메라에 물 들어갈까봐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오늘 사진 끝.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내려왔다. 버스는 폐교가 된 초등학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시 경 산행을 시작했고 내려온 시간은 저녁 여섯시.
일행 중 요가 선생님이 계셔서 버스에 오르기 전 간단한 스트레칭 지도를 해주신다네. 난 참 운도 좋지!
비록 선 채로였지만 15분간 쭉쭉 뻗고 나니 한결 낫다.
저녁으로 인월면의 한 식당에서 흑돼지 삼겹살을 구웠다.
맛? 물어보실 것도 없다. 산행 후였고, 지리산에서 자란 80kg 미만의 어린 흑돼지를 숯불에 구웠는데 뭐...
숙박은 세 집으로 나뉘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최금란 아주머니 댁에서는 특별히 지은 황토방을 내어주셨다.
우체국에 다니다 정년퇴직하셨다는 아저씨께서 아껴 드신다는 연꽃차를 직접 만들어주시기도....
군불 땐 황토방은 빗속 삼십릿길을 걸어온 무거운 삭신을 뜨끈하게 풀어주지만.... 어젯밤에 이어 오늘도 잠이 안 온다.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처럼 고단했는데.... 최근에 갑자기 찾아온 불면증이다. ㅜ.ㅜ
잠 못 이루는 밤 위로 굵은 빗방울이 줄기차게 쏟아져내린다.
오늘 밤새 내리고 내일 아침엔 갠다고 했는데 내일도 종일 비가 내리면 어쩌지?
이틀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내일 끝까지 잘 걸을 수 있을까?
내일은 거의 등산코스라는데 미끄러운 빗길 걷다가 무릎 나가면 어쩌지?
아침에 혼자 남아 늦잠 자고 싸우나 갔다가 구간 중간쯤 되는 벽송사까지 택시 타고 들어가 합류할까? (ㅋㅋ)
잠이 안 오니 이런 소심한 생각들이 점점 단단하게 뭉쳐져 불면의 밤을 더 무겁게 내리누른다.
날이 밝으니 어젯밤의 근심걱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露地의 비바람을 맞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저 모종들처럼 파릇한 힘이 솟아난다. 역시 '지리산의 정기 받아...'라는 표현이 빈말은 아닌가보다.
표고버섯 넉넉히 넣고 무와 황태가루로 맛을 낸 시원한 국, 거기에 두릅, 고사리, 취나물까지 어우러진 최고급 웰빙아침상에다가 점심으로 먹을 주먹보다 더 큰 주먹밥을 받아드니 오늘 하루 너끈히 쓸 에너지 충전 완료!
아직도 빗방울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건넛 산으로 기어올라가는 구름떼를 보니 이제 차차 날이 개겠다.
정성으로 돌봐주신 마을 이장님, 사무장님, 따뜻하게 잘 쉬다 갑니다. 다음엔 가족들과 함께 올께요~
오늘 걸어갈 제2구간의 들머리는 매동마을에서 버스로 이동한 의중마을, 어제 우리가 하산했던 금계마을 폐교 건너편 마을의 뒷산.... 방부목 계단으로 시작됐다.
쵸큼 힘들게 올라왔다 싶으면 바로 아기자기 편안한 길로 달래주는.... 너그러운 둘레길.
앞의 두 글자로 부르면 천재요 뒤의 두 글자를 거꾸로 부르면 영재가 되는 국제미남 천재영군의 엄마아빠.
친한 후배라 1년에 두세번은 만나는 사이지만 이 둘레길 여행에 참가하는 줄은 몰랐는데, 어제 버스에서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술 좀 먹을 줄 알면 후배 남편이 연신 권하는 동동주에 푹 빠져버렸을 텐데... ㅎㅎ
일산에서 온 수빈이, 주연이 자매... 평소 정발산과 고봉산에 꾸준히 다녔다더니 등산화에 스틱까지 제대로 갖추고 부모님과는 독립적으로 의젓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의중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 도착한 西庵.
입구부터 바위에 새겨진 대단한 조각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바로 멋진 터널(대방광문) 안으로 들어오란다.
극락전 안의 불상들도 모두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살려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아름다운 숲과 바위, 바로 눈 앞에 걸린 풍성한 구름...
이렇게 화려한 곳에서 과연 구도에 정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찰이다.
서암정사와 주차장을 같이 쓴다 해서 가까울 줄 알았는데.... 아니, 거리는 멀지 않은데..
꽤나 가파른 콘크리트길을 기어올라 도착한 벽송사.
아기자기한 서암정사에 비해 넓고 늠름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깊고 깊은 칠선계곡 초입에 있는 이 절은 빨치산들이 인민병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벽송사에서 산길로 들어 얼마 안 간 지점에서 발견한 해설간판은 이 일대가 빨치산들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알려준다. 소설 남부군에서였던가? 겨우내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다 초죽음이 된 주인공이 봄햇살에 이끌려 정신없이 걷다가 어느새 마을까지 내려오던 장면.... 갑자기 내 발은 얼음 위를 걷는 동상 걸린 발처럼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아아, 무심한 신록이여.... 꽃보다 더 눈부신 신록이여!
너는 피비린내 속에서도 묵묵히, 해마다 얼어죽고 다시 태어났겠지.
우리의 요가선생님은 지리산의 기를 받으며 명상중이시다.
떨어진 솔잎들이 폭신하게 깔린 길을 걷는다는 건... 도보여행 최고의 호강.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니 작은 기념관이 기다리고 있다.
평가가 어떻든 간에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후대들의 역사의식 함양에 아주 중요한 일인데
너무 빈약하고 관리인도 없이 버려진 듯한 기념관을 보니 속이 상한다. 이름도 저게 뭐냐, 루트 안내소?
요즘 청소년 중 태백산맥을 읽을 정도로 생각이 깊고 호흡이 긴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중1인 정호?가 전시된 사진해설 중 '하준수'라는 이름을 보고는 '아, 하대치 아버지...' 한다. 와~ 다시 봤다.
화전민들이 산다는 송대마을이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입구에 금줄을 쳐놓은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우리 동의도 없이 우리 집 뒷뜰을 지나가게 해놓고는 둘레길 개통했다고 떠든다'며 행정관청을 원망하는 아주머니 앞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인가에 내려오니 다리가 풀리는 걸 어떡해... 여기저기 배낭을 부려놓고 아무데나 주저앉아 우리는 주먹밥으로 시장기를 달랜다.
생일을 맞은 멤버가 두 사람이나 있단다. 미처 선물 준비도 못했으니 어째.... 노래로만 축하해줬다.
그래도 각각 한 번씩 두 번을 불러줬다. ㅎㅎ
이제 하산길이다. 길은 딱딱한 콘크리트 임도지만...
파노라믹하게 펼쳐지는 전망이 이러한데 무슨 불평이 있으랴.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풍경 아닌가.
윗 사진의 우람한 소나무 그늘이 좋아 가까이에서 찍어보니.... 흠~ 작품일쎄.
의기양양, 그 배경에 사람을 앉혀놓고 찍어보니....
아름다운 그녀와 고인 물에 비친 흰구름과 윗사진이 잡았던 먼 봉우리까지 잡는 건 욕심이었나보다. ^^
수빈이 앉혀놓고 다시 시도... 수빈이만 예쁘게 나왔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기념으로 나도 한 장.. 볼품없는 사람만 크게 나왔다.
지리산 둘레길 이틀 동안 걸었던 얘기 여기서 끝!
아참, 꼭 해야 할 얘길 빼먹을 뻔 했다. 이미 써놓은 글로 봐서는 사족이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 내가 만난 지리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상하고 친절했다.
거리나 난이도는 평소에 하던 뒷산 트레킹 코스(삼성산 성지 - 보덕사 - 돌산 - 호압사 - 삼막사 구간)를 네 차례쯤 왕복한 정도? 두 구간 모두 처음 오르막과 마지막 내리막이 조금 힘들지만 그 구간만 속도조절 잘 하면 체력이 조금 약한 사람도, 다리가 시원치 않은 사람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리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아, 물론.... 땡땡 부은 종아리를 잘 풀어주지 않아 다녀온 이튿날 종일 절뚝거린 게 사실이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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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길을 눈으로나마 함께 걸어주신 분들께... 지리산에서 모셔온 야생화 한다발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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