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1년, 비용 3,000만 원으로 계획했던 1년짜리 세계여행 스케줄을 남편의 권유에 따라 대여섯 토막 낸 뒤로 두 차례 길을 떠났었다. 중남미 한 바퀴, 인도지나반도 한 바퀴.....
미진하긴 했지만 어쨌든 돌긴 돌았다.
욕심은 앞서고 시간은 없고..... 아쉬움도 많지만 돌 때 미처 씹지 못하고 넘겼던 순간들을 블러그질로 되새김질하며 충분히 즐거웠으니 이 ‘기획여행’은 나름 성공적으로 보인다.
중간점검을 해보니 기간으론 약 1/2을(5개월 열흘), 비용으론 1/3(1200만 원) 정도를 소진했더군.
이제 제3차 여행을 계획할 시점인데......
사실 두 번째 여행을 다녀온 뒤로 약간의 냉각기가 있었다.
직업적인 목적도 없고 개척의 길도 구도의 길도 아닌 길을 왜 난 계속 걸으려고 하는 걸까.
취미활동으로 치기엔 비용이 높고 소일꺼리로 치기엔 젊은 나이가 신경 쓰이는, 아무래도 과분한 방랑행각 이제 그만 내가 알아서 접어야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여행을 다니며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즐기는 건 다름 아니라 낯선 환경 속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 허무할 뿐 아니라 가족을 이루고 정착해서 사는 여자에겐 가당찮은 욕망이라는 것. 그 본능적인 허기를 '여행'이라는 간식으로 달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한동안 날 울적하게 만들더군. (백말띠 아부이, 어째서 저까지 유목민으로 낳으셨나요... ㅜ.ㅜ)
그러나 어쨌건 다시 3차여행의 깃발을 든다.
계기는 내년 3월말 전에 출발하는 유럽행 티켓을 세일한다는 JAL 항공의 광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하늘이 내 창문을 기웃거릴 때까지 방치했던 몸과 마음의 게으름을 어떻게든 떨쳐내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에....
예매 버튼을 클릭하면서 다짐했다. 최소한 발권기한인 9월 25일까지 기초적인 준비 두 가지(매일 6킬로씩 걷는 것과 하루 한 시간 이상의 스페인어 공부)를 하루라도 빼먹으면 구매하지 않겠다고...,..
오늘로 결심 일주일째다.
날씨도 좋은 데다 그간의 방치로 불어난 3킬로그램의 하중에 괴로워하던 무릎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체중계도, 먼지 속에 파묻혔던 스페인어 단어들도, 게다가 남편까지도 격려를 아끼지 않으니 마음 속의 시끄러움은 툴툴 털어버리고 열심히 준비하기로 한다.
이번 일정은 2개월 반. 내년 3월 12일에 떠나서 5월 28일에 돌아올 예정이다.
원래 준비했던 루트는 유럽을 두 차례로 나눠 간다는 계획 아래 그 첫번째 루트로서
터키로 들어가 동유럽을 돌아서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거쳐 터키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용을 따지다 보니 내 자금사정으로는 유럽을 두 번씩이나 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남들 도는 루트로 단번에 돌까 생각중이다.
물가가 비싼 나라들이니 이 여행 마치고 나면 기간과 자금이 1/3로 발맞춰 남겠군.
아직 구체적으로 짜지는 않았지만 터키 대신 (어차피 투어가 많은 루트니까 훗날 패키지로 가도 되니)
스페인에서 가까운 모로코를 넣을 예정이고,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시간을 좀더 할애해서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추천했던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스페인 구간 부분동행하겠다는 친구가 정말 약속을 지킨다면 스페인어도 되살릴 겸 스페인에서도 시간을 넉넉이 보내고 싶다.
그리고 남미여행길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이 사는 도시도 일정에 넣어야지. 프랑스 샤모니에는 레베카가, 독일의 베를린에는 로니가 있고, 쾰른 인근의 작은 수녀원에서는 친구 언니가 기다려주실 것이다.
(이 친구도 수험생 아들이 올해 대학에 합격만 하면 날아오겠다고 한다.)
내년이면 쉰 셋, 이제 배낭 지고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쉰 다섯쯤이면 내게 남아있는 자금과 기간을 다 소진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우예됐든 쉽지 않게 만들어낸 기회이니 최선을 다해 누리는 것만이 지금 내 상황에서는 가장 현명한 일 아닐까 한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걸었다. 가려면 걸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