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고열을 발견하고 날이 밝자마자 응급실로 갔던 것은 12월 8일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전쟁은 그보다 열흘 전쯤 시작된 것 같다.
11월 넷째주는 환자에게 꽤 고달픈 한 주였다.
월요일은 신경과 진료, 화요일은 두경부암센터 진료.
수요일은 종양내과 진료와 함께, 종양내과에서 처방한 방사선 치료 준비를 위해 방사선종양학과까지 들르느라고 반나절을 병원에서 보냈고
그 와중에 당일에 못한 운동 보충한다고 빈 시간을 이용해 창경궁 산책까지 한 시간 넘게......
목요일엔 중국에서 온 직원들 만나보겠다고 시화공단까지 행차하여 전 직원들 앞에서 한말씀 하시고 신림동 집에 들려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다섯 시로 예약된 CT 촬영(방사선 조사를 위한 지도 제작용)까지..... 집에 돌아오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종일' 자기 시작한 것은 그 날부터였던 듯 싶다.
고단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종일 잠'의 주범은 진통제였다.
11월 다섯째주부터는 매일 아침 방사선을 쪼이러 다녔다.
남편이 몸에 배인 부지런함을 못이기고 첫 시간으로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니 고달프기도 하겠지...
'종일 잠'은 그래서 다섯째주 내내 또 방치되었다.
게다가 종양내과에서 처방받은 울트라셋으로도 진통이 충분치 않은지 비몽사몽 헤매는 가운데서도 간간이 신음소리를 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수요일부터는 얼굴이 붓고 입술이 부르트면서 구내염이 생겼다. 안 그래도 잘 안 벌어지는 입 때문에 간신히 넘겨왔던 국말이밥을 거부하기에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에도 발진이 돋았다. 모든 것이 방사선 부작용인 줄 알았다. 걱정은 되지만 치료가 끝나면 서서히 해결될 테니 잘 참기만을 바랬다.
남편은 그 와중에도 오전에 병원에 다녀와 한숨 잔 다음 오후 산책을 나갔다. 반달이를 원래 살던 집에 데려다주었던 12월 1일까지는.
방사선 치료 경과를 보기 위해 예약되어 있는 진료일이 마침 발진이 시작된 다음날이어서 선생님께 구내염과 발진을 알렸더니
방사선 부작용 중에 구내염이 있긴 해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고 더군다나 발진은 방사선 때문이 아닐꺼라면서 피부과에 가보라고 한다.
울트라셋으로 진통이 잡히지 않는다고 하니까 약의 용량을 하루 네 알에서 여섯 알로 늘려주었다.
피부과에서는 가글액 헥사메딘과 로션 타입의 연고제를 처방해줄 뿐....
하지만 구내염과 발진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입술은 오리주둥이처럼 부풀어오르고 침을 뱉을 때마다 피고름이 떨어져나온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파묻혀버릴 지경으로 부어올랐고,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뿌려 임시로 아물게 한 입 주변은 검은 딱지로 뒤덮였다.
얼굴 뿐 아니라 몸 전체가 야단이 났다. 마치 무지막지한 선탠으로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벌겋게 변하고 껍질이 끝도 없이 벗겨져내린다.
가려움증이나 통증이 없는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제일 큰 문제는 식도까지 헐었는지 죽도 못 넘기고 엔슈어(영양음료) 세 캔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것이다.
다른 뒷바라지라면 병원의 지도를 받으며 집에서 못할 것도 없지만, 영양공급 문제만은 어째볼 수 없는 일이라서 내심 입원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이 웬만하면 집에 있기를 바라고, 입원을 하고자 해도 응급실을 통하지 않는 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병상 한 자리 차지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그렇다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뿐인 호스피스 병동을 찾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고...
망설이던 중에 드디어 사단이 났다.
며칠 전부터 남편이 몸이 뜨겁다는 건 알았지만 발진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한밤중에 무심코 남편의 얼굴을 쓸어보다 깜짝 놀랐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불덩어리였다. 체온계로 재어보니 38.9도......
항암치료를 할 때 탈수 될 정도의 설사나 갑작스런 복통, 고열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119를 부르라고 했다. 지금이 그런 상황 아닌가.
시계는 새벽 두 시 반. 부랴부랴 입원짐을 싸는데 조금만 기다렸다가 그냥 우리 차로 가자고 남편이 고집을 피워 급한대로 냉찜질을 해주며 날을 새웠다.
응급실에 들어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응급실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하고 나니 수액 하나 꽂아주면서 대기실에서 기다리란다.
검사 결과 염증 수치가 높아 위험하다고 응급실에 들여보내준다는데 도무지 병상이 나야 말이지.
고열에 지친 남편은 눈조차 제대로 못 뜨는 지경이다. 사람들의 양해를 얻어 대기실 의자 몇 개를 붙여서 눕혀놓고 장장 일곱 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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