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Ⅱ - 6. 6·29선언과 공개 노동운동

張萬玉 2012. 1. 7. 09:26

청주교도소에서 석방되면서 바로 연세대 이한열군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이미 연세대 교정은 수십만의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연세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을 따라 시청앞 광장까지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엔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최초의 항복선언을 받아낸 시민들의 열기가 아직도 그대로 들끓고 있었다.

‘드디어 이긴 것일까!’ 막 석방된 흥분까지 더해져 내 가슴은 터질 듯 뛰었다. 비밀활동 아니면 경찰의 진압에 맞선 경험밖에 없던 나에게 그 거대한 민주주의의 현장은 꿈 속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6·29선언 직후의 사면조치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서노련의 경우 김문수 선배 같은 지도급 인사들은 여전히 감옥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마친 석방자들은 귀가하지 않고 곧바로 신민당사로 몰려가 농성을 하면서 김영삼 총재를 면담하는 한편 운동의 향후 방향에 대해 토론하기로 했다.

신민당사에서의 농성과 토론은 김병곤이 주도하였다. 김병곤은 1차로 나온 석방자들을 조직하여 정치권에 대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열린 정치공간도 중요하지만 이 공간을 이용하여 노동자대중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므로 우리 노동운동가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가 노동자대중들이 떨쳐일어서는 것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 노동운동가들에게 당면한 임무라고 노동운동 후배들을 설득하였다.

 

 

노조결성 지원활동을 시작하다

 

예상대로 7월초에는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서막을 올렸다.

나는 전태일기념관 사무국장인 정인숙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태일기념관에 노동문제상담소를 꾸렸다. 전태일 기념관을 찾는 노동자들의 상담이나 교육의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때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을 통해 지하철공사 노동조합 결성에 대한 지도를 요청받았다. 수차례 배일도씨와 만나며 지하철공사의 근로조건과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 조직상황 등을 점검하였다. 노동조합결성을 추진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다는 판단이 서자 결성 핵심멤버에 대한 교육에 들어갔다. 20여 명이 배일도씨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김준용과 내가 강사로 나섰다. 결성일자를 확정하고 결의를 다지는 교육인지라 모임은 긴장되고 열기로 뜨거웠다.

드디어 1987년 8월, 57명이 참가한 지하철공사노동조합의 결성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지하철공사에 취업하여 오랫동안 노동조합결성을 준비해온 정윤광 선배는 결성식장 주변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정윤광 선배는 노동조합의 교선부장을 맡아 초기 노동조합 활성화에 열성을 기울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노동조합의 노선을 둘러싸고 배위원장과 대립하게 되었다. 어찌됐든 지하철공사노동조합은 19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배일도 위원장은 서울지역 노동조합협의회를 조직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기업별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는 노동자들의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87년 7, 8월의 노동자대투쟁은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을 정점으로 하여 정부의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대책에 부딛혀 소강국면으로 접어든다. 작은 섬 거제도에 이소선 여사와 노무현 변호사 권인숙씨 등 전국 각지의 노동운동관계자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이때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소박하면서 자기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간성이 마음에 들었다. 장례절차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무대뽀식 주장에 상처 입은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노동운동권이 남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운동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쓴 충고를 하기도 했다. 당시 노동운동권이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세력이라며 신비화하고 생산직 노동자의 거칠고 무례한 언행을 계급적 순수성으로 미화하는 풍토에 대한 경고였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 사무국을 꾸리다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이 절실해지고 있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정인숙 선배로부터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는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의 부문별 조직으로서, 여성노동자회, 노동자복지협의회,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서울지역의 노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각 단체 대표자들은 대부분 1970년대 민주노조의 간부들로서 해고된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심상정, 김준용과 상의한 끝에 열린 공간에 걸맞는 노동운동의 공개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9월에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활동은 기독교회관 내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리면서 바로 개시되었다.

당시 국민운동본부 내부는 양김씨 관련 대통령후보 문제로 뜨겁게 논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위원회는 이러한 논쟁과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대응활동에 집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심상정의 추천으로 기획부문에 인태영, <노동자신문> 편집장에 김진태를 임명하고, <노동자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노동자 집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수도권 노동운동 서클을 공동투쟁의 틀로 묶어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기 때문에, 노동운동 서클에서 파견한 인원들로 기획팀을 구성하고 공동의 슬로건과 투쟁방식, 인원동원 등을 결정하기로 했다.

 

당시 노동운동 서클들은 단순히 PD냐 NL이냐를 넘어 인노련, 삼민, 사노맹, 주체사상파, 비주사NL 등 다양한 정파서클로 분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들 노동운동서클들은 6월항쟁 기간 중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시위를 공동으로 조직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비합법서클이었기 때문에 지도부가 대중투쟁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쉽게 조직원을 노출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노동자위원회는 이 세력을 민생, 민권을 위한 공동투쟁의 장으로 결집시켰다. 집회, 시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합법공간의 위력이 발휘되었다. 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의 <노동자신문>은 모든 집회장소에서 유가로 판매되었다. <노동자신문>은 금세 동이 났고 <노동자신문> 한 부 값으로 만 원짜리 지폐도 성큼 내놓는 시민들 덕택에 신문 판매대금은 신문의 인쇄비와 취재비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대통령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국민운동본부는 사분오열된 채 활동력을 상실하였고 실무자들도 떠나버려 기독교회관 안에 있는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은 텅 비어 버렸다. 그러나 노동자위원회 사무국에는 인원이 계속 늘어났다. 국민운동본부의 요청으로 노동자위원회는 사무실을 국민운동본부 사무실로 옮겼다. 실질적으로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을 임대료 한 푼 내지 않고 접수한 셈이다. 국민운동본부의 실질적 활동은 정지되었지만 그 명성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사무실을 찾았다. 특히 소외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들이 방법이 없을까 하고 찾아오는 일도 많아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혹 도움이 될 만한 기관을 소개해주는 것도 우리의 일이 되었다.

 

대통령선거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상황에서도 노동운동관련 해고자들은 양산되고 있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열심히 출근투쟁을 벌이고 노동부 사무실을 방문하지만 현장 동료노동자들의 지원이 없는 탓에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수도권에서 해고된 노동자들 100여 명이 집단으로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자칫 농성자들과 사무국 실무자들간의 감정적 충돌이 우려될 만한 상황에 대비해 농성자들과의 의견협의기구를 만들고 해고자 복직을 지원하는 공동대책팀을 가동시켰다. 이때 농성장에서 이행원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농성기간 중 원칙적이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는 스마트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가 한 노동운동 서클의 대외협력창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더 자주 볼 수 있었고 이 인연은 훗날 중국에서의 만남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대중, 김영삼, 백기완 등 3인의 대통령 후보가 농성장을 찾았다. 백기완 후보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는 농성 노동자들 앞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일장 연설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노동자들의 질문을 다 듣고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소신을 노련하게 밝힌 뒤 여유있게 농성장을 빠져나갔고 김영삼 후보는 노동자들의 거친 질문에 당황하여 황급히 농성장을 빠져나갔다. 두 후보의 수행비서들 모두 조용히 금일봉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대통령 후보자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사회여론에 반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셈이어서 공동대책팀은 노동운동 탄압 규탄집회를 조직하면서 농성을 해산키로 의견을 모았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 결성

 

일부 서클을 중심으로 노동자 독자후보를 내는 일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노동운동 세력들은 대통령선거라는 열린 공간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선전하고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더욱 고양시켜나가는 데 더 집중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노동자위원회는 노동운동의 전국적 연대를 강화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수도권에서의 활동 외에도 울산, 창원 지역의 노동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노동자집회에 참석하여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으며 부산, 대구, 전북, 전남의 노동운동단체를 방문하여 노동운동단체의 전국적 연대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88년 3월 울산에서 전국노동운동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노동운동탄압에 공동대처하는 전국연대기구가 조직되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1988년 6월에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이하 전국노운협)가 결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전국노운협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고 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산하였다.

 

전국노운협은 노동운동탄압을 저지할 노동자들의 연대투쟁과 노동법개정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이를 위해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조직된 제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를 조직하고 노동운동 탄압 저지와 노동법 개정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해나갔다. 88년 8월에는 업종별 노동조합, 지역별 노동조합 협의회와 함께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하고 전국노운협 사무국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의 상황실로 개편, 노동법 개정투쟁을 대중적으로 조직해나갔다. 서명운동, 등반대회, 지역별집회 등을 조직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88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정신 계승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에 결집시켰다.

경찰의 봉쇄를 뚫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연세대학교에 집결하여 전야제를 치렀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진행을 맡게 된 나는 노동자들의 결의를 모아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평화시위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아마도 서울 한 목판에서의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는 6·25전쟁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여의도까지 행진해나가는 노동자들의 열기는 뜨거웠고 전국적 연대를 이루어냈다는 감격이 넘쳐났다. 각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대열을 보며 연도에 선 시민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다.

 

남편의 회고록을 만들면서 얻게 된 소득 하나가 바로 이 사진.

자료에 대한 인식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진 찍히는 것조차 꺼렸던 엄혹한 세월을 살다 보니 그 시절에 대한 사진이 너무 없어서 아쉬웠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이 사진은 아마 민통련에서 활동하시던 박용수님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1988년 제1회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당시 38세의 최한배씨.(엮은이 주)

 

수만 노동자들을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이끌고 갔지만 사실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계획은 준비되지 않았다. 시위를 잘 마무리짓는 것이 중요한데, 경찰이 저지를 하면 그 위치에서 경찰과 공방을 벌이다 자연스럽게 해산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당초 여의도까지의 평화시위가 가능하리라고는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히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정리집회를 갖고 누군가의 제의에 의해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제1야당인 신민당사를 방문하여 노동법개정을 촉구하기로 결정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은 평화적으로 집회를 종료하고 큰 사고 없이 해산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사를 방문한 200여 명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신민당원들의 저지를 받자 감정이 격해졌고 이는 노동자들의 농성으로 이어졌다.

계획에 없었던 신민당사 농성을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스스로 이끌어가는 것을 지켜보니, 격해진 감정을 정리하면서 토론을 통해 농성투쟁의 방향과 요구조건을 정리해나가는 모습이 과연 노동조합 대표자들다웠다. 이 과정에서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부의장이었던 단병호 위원장의 지도력이 단연 돋보였다. 당시 그 자리에는 마창노련 위원장을 비롯한 각 지역 노동조합협의회 의장과 현대중공업위원장 등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 위원장도 참여하고 있었다. 엉겁결에 벌어진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단위원장은 과감하게 투쟁과 토론을 이끌면서 전국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 대중의 지도자는 투쟁 속에서 발굴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후 중소기업 노조의 위원장인 단병호 위원장은 서노협 의장을 거쳐 전노협 초대의장을 역임하게 된다. 농성은 신민당 사무총장과 김영삼 총재가 노동법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종료되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면서 노동운동의 위상이 높아져 민주화세력 가운데 학생운동 다음으로 대중동원력을 갖춘 잘 조직된 세력으로 부상되었다. 자연히 1989년 1월에 결성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부문별 단체이기도 한 전국노운협의 전민련 내 위상도 강화되었다. 전국노운협은 사무실도 광화문의 전민련 사무실 2층에 자리잡았다.

1989년 5월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전교조는 결성과 동시에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위원장이 구속되었고 1,500여 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당시 재야세력의 구심인 전민련은 합법정당 건설을 둘러싼 논쟁으로 지도부가 분열되어 대중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노운협은 전교조 탄압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이를 노동운동이 민주화세력 간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제조업 노동조합과 사무직 노동조합을 움직여 전교조와 연대하게 하는 한편 여성단체 등 재야단체를 망라하는 공동대책기구를 발족시키면서 재야세력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초첨을 맞추었다.

 

1989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을 위한 대중적 결의를 밝히는 집회로 조직되었다. 전야제와 집회를 마친 전국의 노동자들은 경찰과 연세대 정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이 집회를 발판으로 90년 1월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이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이 중심이 되어 개최되었다.

전노협이 결성되면서 <노동자신문>은 전노협으로 넘어갔고 전국노운협은 <노동운동>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면서 전노협의 활동을 측면지원하였다. 전노협의 사무국은 각 노동운동 단체로부터 유능한 노동운동가들을 대거 차출하여 구성하였다. 심상정도 이때 전노협 사무국에 합류하였다.

전국노운협과 각 지역 노동운동단체들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조직한 단체들이다. 이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일어선 노동조합들이 권력과 자본에 맞서 벌이는 제도개선 투쟁을 지원하고 이들의 전국적 연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기 전까지 전국노운협은 과도적으로 노동자대중의 전국적 연대를 주도하였고 전노협 결성 이후에는 전노협을 뒷받침하는 일에 진력하였다. 또한 전교조 사수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는 기층민중들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광범한 연대 활동을 조직하였다. 

 

1989년말과 1990년초에 걸쳐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는 인사들의 탈퇴로 전민련 지도부가 약화되자 전민련에서는 사무처장을 노운협에서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국노운협 중앙위원회는 나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전민련 사무처장에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민운동본부와 전민련 사무실의 곁방살이를 하는 동안 내 눈에 비친 재야운동은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몇몇 명망가들의 서로 다른 주장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리한 토론으로 날밤을 새우거나 기존 정치권에 줄을 대며 개인적 출세를 넘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개인적으론 정말 맡기 싫은 직책이었지만 조직의 결정을 회피할 수 없어 전민련 사무처장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민련 사무처장 시절

 

전민련 사무처장에 부임한 것은 90년초였다.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와 가까웠고 87년 대선기간중 비판적 지지를 표명했던 김근태 선배가 정책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독자정당 추진세력이 전민련을 이탈한 상황에서 전민련 내 다수파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었다. 다수파의 입장에서도 전민련이 기존 정당의 방계조직처럼 보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정치논쟁에서 비켜서 있으면서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전국노운협에게 전민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국노운협에서는 나 말고도 전민련 상임집행위원으로 김승호 선배를 파견하여 의사결정기구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김승호 선배는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분으로 김근태 선배를 일정하게 견제하면서 전민련의 활동방향을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쪽으로 집중시키고자 했다. 당시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던 전교조의 합법화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민련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전노협, 업종별 노동조합, 전대협, 민교협 등의 광범한 조직들을 공동대책기구에 모아 각 조직의 실정에 맞는 연대활동을 추진토록 했으며, 빈민운동연합의 철거반대투쟁에도 관심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기층민중 대중조직간 연대활동을 촉진하는 데 활동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90년 4월에는 한시적 공동대책기구이긴 하지만 전노협, 전교조, 전대협, 전국농민회, 전국빈민연합, 민교협 등의 대중조직이 참가하는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이 결성되었고 집행위원장에 전교조의 이수호 사무처장이 선출되었다.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에 대한 지원연대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선은 재야단체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면서 전민련의 활동에 활력을 부여했다. 전민련이 스스로 주도성을 앞세우기보다는 자기를 낮추면서 광범한 세력을 모아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니 전민련에 대한 대중조직들의 신뢰도 자연히 회복되었다. 노동조합과 대중사업을 해나가면서 익힌, 대중을 사업의 주체로 세우려는 노선은 역시 전민련 사업을 해나가는 데서도 그 옳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러한 노선에 대해 특히 민교협의 교수님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열심히 연대활동에 참여해주셨다. 그동안 민교협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왔지만 연대기구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전민련 사무처장은 사업을 기획하고 그 기획안이 결정되면 이를 집행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살림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동안 전민련의 재정은 주요 간부가 각자의 직책과 능력에 따라 일정하게 납부하는 재정분담금으로 꾸려져 왔다. 주로 이부영, 장기표, 김근태 등 명망가들이 개인적 후원자들로부터 받는 후원금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 정치권의 후원금도 유입되었다. 각 단체별로 회비가 할당되어 있긴 해도 대부분 장기간 미납상태였다. 전임 사무처장이었던 장기표 선배는 재정문제엔 관심이 없었던 듯 재정에 대한 인수인계도 없이 전민련을 떠났다. 나는 사무처장을 맡자마자 일단 재정지출을 최대한 줄였다. 사무처 인력도 최소화하였다. 아울러 부문별, 지역별 가입단체의 분담금을 재확인한 뒤 이의 납입을 독려하였다. 공동대책기구의 연대사업을 할 때도 공동대책기구에 참여한 단체의 분담금으로써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로써 전민련의 일상 재정을 꾸려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졌지만 각종 행사로 인해 남발된 인쇄물에 대한 빚에 대해서는 대책이 안 섰다. 전민련이 천만 원이 넘는 빚을 수개월째 떠안기고 있는 업체들은 매우 영세한 업체들이었다. 운동적 대의 때문에 외상으로 인쇄를 해주었지만 영세업체로서는 자칫 부도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다른 돈이라면 전임자의 책임이라며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나의 운동 신조상 이 돈 만큼은 내 집을 팔아서라도 정리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전민련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전민련 내부에서는 90년 11월에 결성된 민중당을 민족민주운동의 일부로 지지하고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는데, 나는 각각의 주장과 의견을 사전에 정리하여 제출하고 대의원대회에서 제안설명을 한 뒤 찬반토론 및 표결을 통해서 이 문제를 결정하자고 주장하였고, 각 부문과 지역의 대표자들이 모인 중앙위원회는 이 방안을 승인하였다. 아울러 지도부와 집행부도 추대형식이 아니라 대의원대회에서 직접 선출하도록 하고 집행을 책임지는 상임집행위원장직을 신설하자는 제안을 하여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분담금이 미납된 지역과 부문 단체에게는 대의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91년초에 열린 전민련의 정기대의원대회는 여느 대회와는 달리 매우 뜨거웠다. 한양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대의원대회는 100%에 가까운 참석률을 기록하며 마지막 순서인 상임집행위원장 선출시까지 대의원들이 한 사람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울러 1년 가까이 체납된 분담금이 전액 납부되는 이변이 일어나 장기간 밀렸던 인쇄비 등 심각했던 재정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나는 상임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김근태 선배에게 나의 업무를 인수인계한 뒤 전민련을 떠났다. 전민련에서 일하는 동안 나름대로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원치 않았던 직책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니 그저 홀가분할 뿐이었다.

 

윗 사진과 같은 옷을 입은 것 보니 같은 날 찍힌 사진인 듯하다. 사진 맨 왼쪽이 최한배씨, 그 옆이 이영순 노운협 의장,

앞줄 끝쪽으로 전민련에서 지원 나오신 이부영 선생님과 장기표 선생님, 박계동 전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87년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 폭풍처럼 터져나온 노동대중의 열기를 받아안기 위해 정신없이 달렸던 4년간은 나의 노동운동 기간 중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다. 권력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기업과 업종과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연대하는 것, 노동자들이 기층 민중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세력과 연대하는 것, 이러한 연대를 통해 기층 민중들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꿈 하나로 열심히 일했다.

지원과 연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자본과 권력의 탄압 속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노동자들을 방문, 격려하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주는 것, 지금은 힘들지만 꼭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스스로 힘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지원이라고 해봐야 방문과 격려집회, 모금과 등산단합대회, 다양한 문화활동을 통해 단결을 모색해보는 것 정도였다. 당시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의 집회 때마다 헌신적으로 그림과 음악, 춤 등의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제공해준 예술인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휴식기간 중의 구속

 

어쨌거나 권력과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전노협)도 결성되었고 제조업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의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동자, 농민, 빈민 및 지식인 단체와의 연대활동도 일정한 궤도에 접어들게 되었다. 운동의 중심도 소수 활동가가 주도하던 시대에서 대중조직이 주도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대중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특정 활동가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던 나는 전민련 사무처장직을 떠나자 어떠한 소속도 없는 한 개인의 신분이 되어버려 스스로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아나가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문수 선배는 민중당을 같이 해보자고 적극 권했지만 내겐 정치에 나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랜만에 휴식을 갖게 된 나는 담배도 끊고 도덕산도 오르내리면서 가족과 시간을 같이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과연 무엇일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문수 선배를 만나려고 민중당 구로지구당 사무실을 방문했던 어느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문상차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안양병원 영안실에 갔더니 의문사의 원인을 밝히라는 노동자들의 항의집회와 이를 막는 경찰병력으로 인해 병원 주변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문상을 마치고 잠시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빈소 출입문이 봉쇄되더니 경찰의 강제진압이 시작되었다. 고인의 빈소는 순식간에 이수라장이 되었고 빈소에 있던 사람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경찰의 강제진압 움직임이 시작되자 대책위원회의 중심인물들은 안내를 받아 빈소를 빠져나갔지만 그런 상황을 몰랐던 나는 빈소에 남아 있다가 그대로 연행되었다.

경찰에서 신분을 밝히자 그들은 횡재나 한 듯 기뻐하더니 그대로 구속시켜버렸다. 전국노동자대회 등 각종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여 형사들이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비공개 수배상태에서도 잘 피해다녔는데 어이없게도 단순한 문상으로 인해 구속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한 번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는 죄질 여부와 상관없이 절대 집행 유예를 받을 수 없는 케이스가 되어, 지난번에 집행이 유예되었던 8개월 형까지 합해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꼬박 살아야 했다.

세 번째 징역은 안양구치소와 안양교도소를 거쳐 순천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