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Ⅱ - 7. 전환을 위한 모색

張萬玉 2012. 1. 7. 09:38

나를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한 것은 경동교회 시절에 받은 감화 즉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라는 가르침이었으며 대학생 친구를 절실히 원했던 전태일의 육필일기였다. 평생을 노동자로 살며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매우 소박한 휴머니즘이 내 노동운동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 과정 속에서 나는 어느덧 유물론자로 사회주의자로 변모해갔다. 현실성은 없어 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사회주의혁명을 꿈꾸기도 하였다. 세상을 확 바꿔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적 기반은 너무나 취약했다. 여러 가지 잡다하게 책은 많이 읽었지만 체계적인 이론학습을 할 기회가 없었다. 항상 그럴 듯한 이론을 자신있게 주장하는 운동가들을 만나면 은근히 주눅이 들곤 했다.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운동에 대한 방향을 잡아나가야 할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체계적 이론학습에 대한 갈증은 더욱 절실해졌다. 나는 이론가들이 말하는 경험주의자였다. 나의 활동이 결과적으론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자신의 경험과 상황에 갇혀 세상을 넒고 길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론가를 자처하는 자들 중엔 변해가는 세상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어줍잖은 도그마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나의 사상적 전환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진 않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에서도 문득 이건 아닌데, 이러자고 우리가 운동을 시작한 건 아닌데 하며 회의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계기들만을 언급해보겠다.

88년 김문수 선배가 석방된 이후 김문수 선배와 나, 심상정 세 사람은 정기적으로 만나 현 정세와 노동운동의 동향, 향후 노동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서노련의 실패 경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체계적으로 이론학습을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략 1989년경으로 기억한다. 노동운동권 내에서 정통 맑스주의 연구자로 알려진 김수길씨를 초빙해서 맑스레닌주의의 기초이론을 정기적으로 학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학습이 시작되고 몇 차례 지나지 않은 어느날 김수길씨가 들고 온 것은 소련공산당에서 발행한 페레스트로이카에 관한 문건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게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내 이론가들이 수십 년 동안 소련의 사회주의혁명과 건설과정을 연구하는 가운데 스탈린과 레닌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발전시킨 이론적 산물이니 함께 공부해보자고 했다. 그의 결론은 우리가 막연하게 꿈꿔왔던 현실의 사회주의국가는 실패하였으므로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처럼 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급격하게 고양된 노동운동의 분위기 속에서는 가차없이 수정주의자 변절자로 낙인찍힐 만한 것이었다. 당시 노동운동권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87년 노동자대투쟁만 보았고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중국의 개혁개방,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는 보지 않았다. 우리는 진지하게 소련공산당의 페레스트로이카 문건을 정독하면서 김수길씨의 해설을 경청하였다. 근 백년에 가까운 사회주의혁명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이 명백했다. 운동의 목표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고와 운동방식의 전면적인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서울 상대의 안병직 교수는 경제사를 전공하면서 운동권의 이론적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이다. 김문수 선배와는 사제지간으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1980년대에 일본에서 수년간 공부하시던 중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의 경제와 사회실상에 대해 파악하게 되면서 이론적인 전환을 도모하셨고, 귀국 후 낙성대연구소를 중심으로 중진자본주의의 캐치업 이론을 주장하셨다.

김문수 선배를 따라 낙성대연구소의 토론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내가 두 번째로 석방된 직후쯤이었을 것이다. 안교수님은 일본에 계실 때 소련, 중국, 북한과 교류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들을 통해 이들 사회주의권의 실상을 자세히 들었다면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주장하셨다. 특히 이영희 선생님의 ‘8억 인과의 대화’를 통해 감명을 주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민에게 대재앙이었다는 말씀과 함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을 역설하시면서 운동권의 사고 대전환을 촉구하셨다.

93년초였다. 낙성대연구소에서 중국 기업인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진행했는데, 그는 당시 중국사업 진출을 추진하고 있던 임무현 회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특별히 낙성대 연구소에서 마련한 간담회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이들은 광둥성에 있는 국영기업체의 책임자로서 당서기를 겸임하고 있었다. 이들 일행 3명은 해외여행이 처음인지라 잔뜩 긴장하였고 차림새는 매우 촌스러웠다. 그들과의 질의응답에서 사회주의국영기업이 천민자본주의에서나 시행하는 갯공제를 성과 인센티브제로 채택하고 이를 기업개혁으로 내세우고 있음을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20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자의 착취수단으로 매도되던 갯공제가 사회주의국가의 국영기업에서 개혁의 횃불로 살아나다니....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그 실상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 사고전환의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노동운동 내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깨달음이었다.

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에게 도덕군자처럼 운동의 대의를 강조하는 지식인 선배는 필요치 않았다. 특별히 노동조합 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클조직의 지도부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이미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운영논리에 따라 움직여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노동해방과 노동자의 계급성과 당파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합원의 경제적 실익과 선거에서 지도부를 장악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전직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을 지속할 위치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실무자가 되거나 스스로 자신의 활동공간을 꾸려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노동운동 내에서 나의 역할은 종료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노동인권회관에서 열린 석방환영회는 노동운동 동지들과 작별하는 자리가 된 셈이다.

 

임무와 역할이 종료되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92년 말 석방된 이후 나는 적극적으로 그 길을 모색했다. 아마도 내가 인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고 그대로 노동운동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의 사상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1992년말 순천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을 때 나는 노동운동 속에서의 내 역할과 임무가 사라져버렸다는 점, 김문수 선배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순천까지 와서 나를 맞아주었지만 그것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동지애일 뿐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문수 선배는 노동인권회관에서 일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나는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기로 결심하였다.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운동에 몸 담아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감옥에 묶여서조차도 그 주장이 굽히지 않는 자유인들이었다. 그러나 기업이나 행정을 책임지고 운영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책임질 일도 없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고 주장해왔지만 모든 책임에서도 자유로웠다.

사회주의권의 실패는 국가경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패한 것이었다. 나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구체적으로 생산하는 분야에서 일하면서 우리가 그곳에서도 무능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의지를 확인한 김문수 선배가 임무현 선배를 소개해주었다. 노동운동 1세대로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임무현 선배는 중국진출을 계획하고 있으며 중국에 가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광활한 중국대륙!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좁은 나라 안에서 콩이니 팥이니 다투기보다는 좀더 넓은 세계에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었다.

대주전자재료의 임무현 선배와의 인연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다. 노동운동가에서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