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원래 혼자였을 집에 당연히 혼자 있는데 도통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곧 익숙해지겠지.. 마음을 다잡고 공연히 남의 집 대청소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묵고 가면서 남긴 찌끄레기들 이리저리 처분하다 보니 아차 싶다. 이 동네는 쓰레기 처리를 어떻게 하는고...
얼핏 들은 대로 음식 쓰레기는 귤밭 한옆에 살짝 묻고 재활용쓰레기는 나가는 길 어딘가에 있을 처리장에 버리자고 한구석에 싸매두고
타는 쓰레기는 마당 구석 폐드럼통에 넣고 불을 붙인다.
활활 타는 불을 보고 있으니 사납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 내친김에 친구가 챙겨준 고구마를 호일에 싸서 불 속에 던져넣는다.
나눠먹을 사람도 없는데 저 큰 고구마 두 개를 어쩌려고... ㅎ
역시 내친김에 집주인이 문앞에 두고 간 무를 썰고 파, 마늘, 소금, 물, 고추가루 약간만 넣어 간단하게 물김치를 담는다.
오후에는 숙소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이승이오름에 갔다.
막상 오름 정상의 전망은 막혀 있었지만 오름까지 가는 길목의 넓은 초지(현대백화점에서 운영하는 목장이 있다)는 후련하게 탁 트여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름의 왼쪽으로 보이는 한라산 능선이 아름다웠다. 여기는 한라산 둘레길 구간이기도 하다.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했고 일부 급경사 진 구간에는 나무계단과 로프가 설치되어 나같은 노약자를 돌봐주고 있었다.
기우는 햇살에 물든 깊은 숲, 오는이도 가는이도 없이 고적한 숲.
4시에 오르기 시작하여 놀멘놀멘 내려오니 6시,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졌다.
왼쪽으로 보이는 한라산 능선.
오른쪽 동그란 언덕이 이승이(살쾡이)오름이다. 높이가 200미터라 했던가?
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이웃 언덕들
11월 5일
집주인 아주머니 농장에 가서 귤을 땄다.
지금 따는 것은 극조생종이고 조생종은 다음달에, 보통은 1월까지 딴다고 한다.
극조생종이라고 해도 아직 충분히 익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에 꼭지까지 푸른 기 없이 완전히 노랗고 비교적 말랑한 것으로 골라 따라고 한다.
인터넷과 알음알음으로 들어오는 주문량만 그때그때 따기 때문에 일손을 사지 않아도 내외분이 충분히 주문량을 댈 수 있단다.
유기농으로 짓고 바로 따서 보내기에 때깔은 마트에서 팔리는 것만 못하지만 신선도와 맛은 썩 훌륭하다.
장갑 끼고 가위는 들었으나 체험활동 수준의 초보일꾼... 귤 따기 일당이 6만원이라지만 일당은커녕 반당도 못하는데다 일손이 바쁜 것도 아니니
서울에 올려보낼 몇 박스를 저렴한 가격에 받기로 하고 작업 시작.
처음에는 잘 익은 걸 고르는데 시간 다 잡아먹었지만 차츰 이골이 나서, 한눈에 척 알아보고 꼭지도 바싹바싹 능숙하게 잘라내며 속도 좀 붙여보려는데
점심 먹잔다. ㅋㅋㅋ
인근 가시리마을 입구의 향촌식당에서 근사하게 한상 얻어먹었는데 7000원짜리 밥상이 이 정도다. 완전 꿀맛!
별로 일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제 그만 해도 된다니......
재미가 붙기 시작한 장여사, 그럴 수 있나? 다시 가위를 든다.
네 시까지 컨테이너 두 개는 넘게 채웠으리라.
제주 사는 친구는 귤밭 한번 나갔다가 몸살 났는데 난 전혀 힘든 줄 모르겠다. 체질인가? ㅋㅋ
11월 6일
2007년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는 저지오름에 올랐다.
원래는 올레길 13코스를 걸어볼까 했는데 제주 사는 친구가 시간을 내겠다길래, 용수포구에서 시작되는 13코스의 종점인 현대미술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미술관 상설전시관에서는 김흥수 화백의 작품들이, 기획전시관에서는 영원성에의 희구(돌, 물, 이름들)라는 테마의 3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진 찍지 말라는데 찍었다. 선이 너무 고와서... @ --- @
김흥수 화백의 그림은 사실 처음 보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느낌, 자유분방 강렬하면서도 묵직한 색감.....
누드와 추상적인 도형이 화면을 반반 차지하고 있어서 좀 당황했지만.
기획전도 흥미로웠다.
'시간과 인식'이라는 타이틀을 건 한중옥 작가의 작품들은 제주의 돌 현무암을 표현한 듯한데 흥미로운 것은 크레파스화라는 점이다.
cosmic water - 샘'이라는 타이틀을 건 추인엽 작가의 작품들은 내게 생소할 만큼 '환타스틱 '했으나(이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비교적 평이하여 내 눈에 들어온 작품은 이것이었다.
소재가 무엇이었나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재작년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본 정방폭포를 연상케했다.(묵으로 바위만 그리고 힘찬 여백으로 폭포를 표현했던)
양 옆으로 늘어뜨린 염색한 로프가 그림을 더 생동감있게 만들어주는 듯.
무수한 전각 타일로 구성한 '응집' 타이틀의 작품들.... 정말 특이했다. 해외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이관우 작가의 작품이다.
미술관 주변의 예술인촌은 거의 비어있는 것 같았다. 좋은 계절에 작품 구상하기 위해 먼길들 떠나셨나?
기대 이상이었던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저지오름으로 갔다.
저지오름 입구에 있는 요 국수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등반, 아니 산책 시작.
아름다운 둘레길을 반 바퀴 정도 도니 정상으로 가는 오르막.
정상까지는 수월했으나 분화구로 내려가는 길이 아득해보였다.
사진 한가운데 있는 전망대로부터 내리뻗어 있는 나무계단을 보시라......
다행히 분화구 바닥까지 내려갈 일은 없었다. ㅎㅎㅎ
얼기설기 곶자왈을 이루고 있는 분화구 경사면
저지오름에서 내려와,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홉굿 의자마을에 들렀다.
원래 계획했던 올레길 13코스를, 발로가 안 되면 차량으로라도 짚어보고자 기를 쓰고 용수저수지를 찾아갔는데
네비가 가자는 대로 가다 보니 논두렁 밭두렁...... 어둠 속이라면 위험천만일 길로 끌려가고 있다.
날은 저물고 안되겠다.... 어쨌든 저수지는 찾았지만 돌아올 길이 걱정스러워 눈도장만 찍고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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