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오빠가 돌아갈 배는 4시 30분에 출발하지만 역시 1시간 반 전에 차량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3시까지는 항구에 도착해야 한다.
오전에 한 군데라도 관광 시켜드리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전복죽 끓여올리고 (9마리에 9800원이다!) 감녕해변을 향해 서둘러 출발했는데
멋없는 일주도로 대신 내가 즐겨 달리던 중산간도로를 거쳐가려고 중간경유지를 노꼬메오름과 한라수목원으로 설정한 것이 탈이었다.
같이 출발하긴 했지만 애월읍을 벗어난 뒤 시야에서 사라진 오빠의 트럭은 중간 경유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
한참 뒤 수월봉에서 걸려온 전화는 방향을 헷갈려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여기도 좋으니 그냥 여기 구경하고 서귀포 거쳐서 516도로로 넘어오겠단다.
자기 마음대로 다니는 거 좋아하는 거 보면 내 오빠 맞다. ㅋㅋㅋ
점심 때가 되어서야 제주시 맛집으로 이름을 올린 노형동 늘봄흑돼지에서 만나 점심 거하게 먹고
동문시장에 가서 옥돔이랑 황금향 사고 나니 어느새 2시 반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사에 사용한 끌차와 밧줄, 과일박스 등이 실려있기 때문에 계량을 해야 하는데 목포에서처럼 부두 근처에 계량소가 있는 줄 알고 일단 부두쪽으로 갔으나...
검색을 해보니 가장 가까운 계량소는 우리가 점심 먹은 동네 근처였다. 클났네, 잘못하면 트럭 못 싣겠는데...!
하지만 우리 오라방이 해냈다. 우리 먼저 여객선 터미널에 가 있으라고 해놓고는 쌩 달려가더니 개찰이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 휴~ 십년 감수했네.
이제 동생이 제주에 있으니 실컷 놀러오겠다고는 하지만 그 바쁜 양반이 말처럼 쉽게 오실 수 있을라고..... 그저 고맙고 송구할 따름이다.
돌아오는 길에 '빵 굽고 커피 볶는' 이레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1년 전부터 그리워했던 향긋한 호밀빵 한 봉지 사들고 귀가.
12월 29일
아침 일찍 인터넷 기사가 왔다.
지난달 제주에 와 있을 때 3년 약정이면 32인치 삼성LED TV를 사은품으로 준다는 광고를 보고 전화번호를 따두었던 건데
TV는 없이 인터넷만 연결해주고 간다.
이어 영업점에서 전화가 오기를, 인터파크 아이디가 있느냐, 없으면 만든 뒤에 자기에게 알려주면 장바구니에 넣어두겠으니 주문을 하라고 한다.
통신사 가입에 대한 쿠폰 얼마짜리가 제공될 것이고 쇼핑몰에 나온 TV 가격과의 차액은 자기가 바로 송금해주겠다고.....
하하, 무슨 이런 영업이 다 있나. 내 지갑에서는 돈이 안 나가니 상관은 없지만......
이렇든 저렇든 모뎀과 라우터, 셋탑박스까지 왔고 TV 주문을 했으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전에 머물던 집에서 브라운관 티브이가 필요하면 주겠다고도 했지만, 적막할 수도 있는 제주생활에서 포기할 수 없는 취미가 (화질 좋은) 영화감상인 고로.
이제 남은 큰 일은 냉장고와 세탁기 구매.
중고가구와 가전제품들은 서문시장에 몰려 있다.
410L짜리 2012년산 삼성냉장고를 30만원에, 통돌이 10킬로짜리 세탁기를 15만원에 샀다.
그리 싼 것 같진 않지만 두 개 모두 상태가 거의 새 것 같아서 만족.
내친 김에 깔끔한 책 박스 7개(몽땅 2만원, 대박!)와, 너무 높이 달려 도무지 쓸 수 없는 싱크대 수납장을 대신할 레인지대(파란들 7만원)도 샀다.
큰 세간들이 자리를 잡고 나니 제법 살림 좀 하는 집 같다. ^^
주인이 직접 잡은 해물들을 듬뿍 넣어준다고 입소문 자자한 라면집이 동네에 있어 아들이랑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그 라면 한 그릇 먹으려는 사람들이 세상에나...... 인산인해다. 번호표 뽑으라고 해서 뽑았더니 대기 인원수가 43명이라네...ㅋㅋ
포기하고 우리 동네쪽에 더 가까운 집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 역시 대애박~!
세 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수제 빅 버거. 매우 건강하게 느껴지는 맛이다.
일본식 라멘에 전복 새우 꽃게 오징어 등 해물이 넉넉하게 들어간 해물또오멘. 이 역시 2인용이다.
가격이 약간 센 듯 하지만 맛과 분량에서 납득할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오붓한 분위기도 만족도에 한몫 한다.
점심을 먹고 식탁 유리 맞춰줄 집을 찾아 한림읍까지 갔다가, 굵직한 일도 끝났겠다...... 열심히 일한 아들넘 눈호강 시켜줄 겸
용수저수지 부근 작은교회와 모모게스트하우스, 의자마을 한 바퀴 돌다가 해질 무렵에 귀가.
12월 30일
도배의 날이 밝았다.
길이 재고 재단하고 풀칠하고 서로 일 못한다고 갈궈가면서...... 어쨌든 해냈다.
작업량은 얼마 안 되지만 둘이라 가능한 작업이었다.
커튼과 TV가 빠지긴 했지만 이로써 대강 안방 꼴이 잡혔다.
점심을 먹고는 보일러실과 바깥화장실에 있는 묵은 쓰레기들을 끌어내고 대강 청소. 시골집에선 이런 게 큰 일이다.
재사용도 못하는 농업자재 등 무시무시한 쓰레기들을 그 먼 동네 쓰레기장까지 수차례 왕복하며 처리해준 아들녀석, 너 없으면 나 어쩔 뻔했니.
저녁에는 산방산 탄산온천에 갔다.
난방장치 없는 욕실이라 가끔 목욕도 한 번씩 가주어야 하는데, 애월읍에는 목욕탕이 없고 한림까지 가야 한다니 내친김에 소문난 동네로 간 거다.
확실히 물은 좋은 것 같다. 탄산 냄새도 나고 기포도 뽀글뽀글. 시설은 서울의 웬만한 찜질방이나 비슷하다.
수영복 빌려 노천탕까지 나가 밤드리 노닐다 돌아왔다.
12월 31일
죙일 뒹굴뒹굴.
2014년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이 많아진다.
아들이 묻는다. 자기로서는 왜 엄마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고......
나의 대답. 나도 내 스스로에게조차 잘 설명하기 어렵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리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는 걸. 어쩌면 꽤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걸.
짧지 않은 세월 살아오는 동안 본능적으로 했던 선택조차도 늘 그 이상의 보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욕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지.
어쨌든 좌표를 잃고 헤맬 때 최소한 힘차게 날갯짓이라도 해줘야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체득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떻게든 변화를 도모해야 했다.
꼭 제주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감사하게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색적이까지 한 섬과 인연이 닿은 것뿐이다.
이 나이에 심신수련이 웬말이냐 할 친구도 있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내 앞에 펼쳐질 삶을 정성껏 살아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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