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들고 나기
배로 들고 날면서 오랜 시간 조바심 한 끝이라 비행기 출입은 누워 떡먹기겠구나 했는데 웬걸.
아들이 떠나는 날 아침, 눈을 뜨니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제주시 사는 친구가 그쪽엔 눈이 제법 쌓였다고 근심어린 문자를 보내왔다.
도로 사정이 어떨지모르니 아들네미 공항 데려다주려면 일찍 출발하든지 버스를 타도록 하란다.
제설작업을 크게 하지 않는 제주에선 이만한 눈에도 도로사정이 딱해지는 모양이다. 살얼음만 살짝 얼었지 이 동네는 말짱한데......
새해 떡국 한 그릇씩 해치우고는 서둘러 출발, 미끄러운 길 살살 달려 출국장에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비행기 출발이 40분 정도 지연된다는 문자가 왔다. 확실히 제주 드나드는 데는 하늘님의 협조가 많이 필요하겠구나.
혼자 되고 나니 공연히 마음이 허전한 게 꼼짝도 하기 싫지만, 저녁에는 친구네 가족이 온다. 으랏차, 청소기 한 바퀴 돌려놓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다이빙, 심심할 때 아껴보려고 열심히 내려받아둔 영화폴더의 봉인을 해제하여
좀 우울한 컬러의 Blind와 예전에 본 적 있는 Across the Univers를 달게 보았다.
특히 Across the univers에서 Because 나오는 장면을 세 번쯤 구간 반복..
어느새 날이 어둡고 이제 비행기 탄다는 친구의 문자가 온 건 7시 20분. 예약시간이 오후 6시 40분이었는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출발 지연이네.
김포에서 비행기 탄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서 출발하면 게이트에서 딱 픽업할 수 있다.
헌데 게이트 앞으로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건만 한참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
할 수 없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국장에서 기다렸더니 9시 40분이나 되어서야 나왔다. 오늘 하늘님의 심기가 조금 불편하셨던 듯.
同苦同樂
이사 뒤끝이라 심란할 땐데 친구가 오겠다고 떼를 썼다. 그것도 남편과 아들까지 거느리고.
이사 뒤끝이라서 오겠다는 거다. 남편은 머슴급이고 특히 아들이 맥가이버라고......
이 고달픈 상황에서 다른 친구 같았으면 두말없이 거절했겠지만, 이 친구네만은 '손님'대접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냥 오라고 했다.
40년지기인 친구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친구 남편도 2002년에 정말 웃기게 인사를 나눈 이후 http://blog.daum.net/corrymagic/1117360
우리가 중국에 살 때도 놀러왔었고, 우리가 수동에 있을 때도 집이 가깝다고 자주 드나들며 산길 동무를 해주면서 허물이 없어진 사이다.
아, 이 친구네 안 왔으면 어쩔 뻔했니.
나 혼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인데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인부 부르기도 애매한 일들을 아주 속시원하게 해결해줬다.
꼬맹이 때 봤던 친구 아들녀석, 어느새 눈부신 청년으로 자라 외모만 보면 낭창낭창한 아이돌급이라 어디 목장갑이 어울리기나 하겠나 싶은데
일하는 솜씨가 아주 서슴없다. 자랄 땐 걔 엄마조차 걔가 그럴 줄 몰랐는데 군대 갔다와서 맥가이버로 변신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연장통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못 박아주고 비뚤어져 잘 안 열리는 창문들 다 바로잡아주고 음식 쓰레기 묻을 구덩이 깊게 파주고
세탁기 기사가 더운물 쪽에 연결해놓고 간 호스(냉온수 모두 연결하려면 두 개여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다)를 발견하고는 찬물 쪽으로 옮겨주고
(어쩐지 세탁기 돌리는데 김이 팍팍 올라오더라니...그 아까운 개스를 세탁기 몇 번 돌려 다 써버릴 뻔 했네)
커튼 달 레일 박아주고(안 다는 쪽 레일 뜯어다가) 하수구에 맞는 거름망 사다가 끼워주고 삽이랑 호미, 네비 등 농기구 일체 사다주고....
암튼 시원시원하게 나서서 일하는 것이 제 아빠보다도 낫더군. 이 기특한 청년 누가 사위로 데려갈지......^^
아들놈이 호미를 사오자 이제 친구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마당으로 나간다. 갓 수확해서 김치 담아주고 간단다.
사실 나는 손님들 다 가고 난 뒤에 '싸목싸목' 할 셈이었기 때문에 막 뜯어말렸지만 이미 갓과 열무가 뽑히기 시작했으니 이걸 어째.
잡초 속을 헤집고 수확해낸 갓과 무 상추의 일부. 벌레는 먹었지만 제법 싱싱하다.
갓김치는 돌산갓으로나 담는건데 아깝다고 청갓 붉은갓 할 것 없이 버무려 한 통 뚝딱 담가주고
열무 품종도 아닌데 열무 만하게 자라고 성장이 멈춰있는 놈들을 열무김치 삼아 먹으라고 또 한 통 담가주고......시간은 자정 너머 새벽으로~
내가 아는 한 얘도 별로 살림에 목 매는 스타일이 아니다. 가끔 깐 마늘도 찧어놓은 마늘도 사고 손질이 필요한 농산물을 얻으면 한숨부터 쉬는 애다.
근데 남들은 별러서 놀러온다는 제주에, 그것도 귀한 휴가기간 써가면서..... 너 시방 김치 담고 있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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