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서 쓰는 독서 메모
동네 도서관에서 이주일에 다섯 권씩 책을 빌려다본다.
도서대출증을 만들 때 마음은 알뜰하게 독서일기를 남기자는 것이었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ㅋㅋ 책 제목만 남았다.
흘려버리기 아쉬웠던 감흥의 흔적이나마 남겨보고자 간단히.
1월 첫째주
- 다른 제주에 가다(박상준, 스타일북스)
테마별로 묶인 101군데 명소를 소개한 책인데 지금까지 내가 본 제주 여행 소개서 중 가장 쓸모 있다.
필요에 따라 골라 갈 수 있도록 꽤 많은 장소들을 선정했는데 물패(!)가 별로 없는 알찬 선정.
거기다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는 성실한 취재가 돋보여 고마웠다.
같은 저자의 마음이 되어 상당히 공들인 시간을 엿보면서 감동!
무릇 여행안내서를 내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서점에 공연히 깔린 책들이 너무 많아......
- 당신에게, 제주(고선영과 그의 남편, 꿈의 지도)
제주도에 정착한 여행작가 부부가 여행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인데
곱고 예쁘지만 정보 면에서는 내 요구에 못미쳤다.
그래도 트렌디한 장소(주로 까페와 맛집) 몇 군데는 몇몇 벗들을 위해 내 메모장에 옮겨두었다.
- 나머지 세 권은 생각이 안 난다. 이래서 기록이 필요하다. 나중에 생각나면 적어놓기로.
1월 셋째주
-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창비)
너무나 예쁜 문체에 반해 한 권 사둘까, 좋은 글귀 베껴둘까 했던 책.
혼자 오랜 시간을 곰삭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마음 깊이 파고들어왔다.
특히 물오른 청춘의 순간을 묘사한 에필로그에 다달아서는 황홀한 부러움에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로증이라는 은유는 너무 오래 나를 괴롭혔던 주제라 좀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한때 이 작가에 빠진 적이 있다는 친구는 그녀의 다른 저작들을 빠짐없이 읽었는데 나중엔 너무 뻔하더라고....
그런 거지, 천재가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정점이 있고 젊음은 시드는 것이지.
- 남쪽으로 튀어, 1. 2(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감정이입하며 읽었다.
재미있고 짠하고 속도감도 있으면서 어느 장면에서는 페이지를 넘기기 아까워 오래오래 머무르게 한다.
작중 인물 모두의 캐릭터가 살아있고 아이의 시점에서 서술하여 신선했다.
열광한 나머지 영화화됐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영화를 찾아봤는데, 화면은 좋았지만 핵심이 빠져 많이 아쉬웠다.
서울에 와 있을 때 임순례 감독이 만든 한국판 영화도 조금 보다가 말았다.
임순례 감독이 솜씨는 좋지만 이 스토리는 한국에 가져오면 안 되게 돼 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도 꽤나 비장했으나 일본 전공투의 격렬한 원칙주의는 급이 다르지.
게다가 오키나와라는 배경 아니면 절대 이 작품이 살 수가 없다.
아마 제주라는 변방에서 읽어서 이 작품이 더 내게 어필했는지도 모르겠다,
- 공허한 십자가(작가도 출판사도 기억 안 남)
일본 추리소설인데 몰입이 잘 안 돼 중간까지 읽다가 미뤄두고 말았다.
- 다른 제주에 가다
제대로 못 봐서다 다시 빌렸다가 결국 소장용으로 판명. 구입하려는데 친구가 사서 보내줬다.
이런 책 집에 하나 놔두면 놀러오는 사람들도 유용하게 사용할 것 같다.
2월 첫째주는 서울 나들이가 걸려 패스
2월 셋째주
- 조선의 여성상인 김만덕(윤수민, 출판사 기억 안 남)
이왕 제주에 온 김에 이 여인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빌렸다.
작가가 여성이라 그런지 문장이 섬세하고 깔끔하여 페이지가 그림같이 넘어갔다.
나중에 들으니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다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나 궁금했다. 그만큼 캐릭터가 강한 여인이다.
심상정이 그 시대 그 상황에 태어났으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대담하고 담백하고 통 크고...... ^^
- 순이 삼촌(현기영, 창비)
이삼십여 년 전에 읽었던 소설인데 제주에 온 김에 다시 빌렸다.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다시 기가 막히다.
그 끔찍한 시절을 어떻게 이리도 진하게 재구성하셨는지...
뱃속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네 발로 해변을 기어다니며 보말이며 모자반이며 되는대로 주워먹는 순이삼춘의 모습도 눈에 선하고
정이 뚝뚝 묻어 떨어지는 제주 사투리도 마치 내가 듣고 있는 듯 귓가에 맴돈다.
아, 풀어내고 풀어내도 끝내 풀리지 않을 역사의 피멍이여. 그러나 그마저도 어느새 잔인한 세월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우리는 그들의 묏자리를 밟고 다니며 아름다운 산천이라 노래한다.
워낙 강렬한 작품이라 함께 묶인 다른 소설들은 에피소드처럼 흘러갔다.
다음엔 이재수의 난을 그린 '변방에 우짖는 새'를 빌려봐야지.
이것도 예전에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 읽긴 한 것 같은데 제주에 와서 읽으면 역시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울 것 같다.
- 폭삭 속았수다(성우제, 강)
올레길 완주기, 꽤 알차게 쓴 글. 코스를 따라가며 만나는 사연과 풍경들을 알뜰하게 챙겨놓았다.
이것도 올레코스 완주를 꿈꾸는 손님들을 위해 한 권 사둘까 생각중이다. 나도 가끔 펼쳐서 나오는 페이지를 따라 걸어보기도 하고... ㅎㅎ
- 공중그네(오쿠타 히데오, 은행나무)
지난번에 빌렸던 ;남쪽으로 튀어'의 여운이 남아 작가 이름만 보고 빌렸는데
첫 작품 '공중그네'는 좀 신선했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계속 반복되는 포맷 때문에 처음 받았던 신선한 인상이 반감되었다.
한 인물을 다른 세팅 속에 등장시키는 옴니버스 스타일은 흥미로웠다.
나도 소설을 쓴다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긴 한데, 이왕이면 각 작품의 '주제'를 좀더 다양하게 혹은 심화시켜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잡초는 없다.(윤구병, 보리)
마당의 잡초를 무자비하게 캐내던 중이었기에 제목에 꽂혀서 들고 온 책인데 드나드는 손님들 때문에 결국 표지만 만져보고 반납해야 했던 책.
어설프게나마 자연과 친구해볼 맘을 먹고 내려온 터이니 일독할 가치가 있겠(을지 없을)지...(얼핏 보니 너무 글들이 짧았다)
몰아서 쓰는 영화감상 메모
이미테이션 게임
워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특히 전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지라......
컴퓨터 발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앨런 튜링 얘기다.
천재의 대사는 한 마디도 놓칠 수 없는 밀도를 가지고 있기에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다.
세상과 불화하는 천재의 癖이 너무도 안쓰럽지만 어쩌랴, 그렇게 태어난 것을. (내가 깊이 공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ㅋㅋ)
키아라 나이틀리는 내가 본 그녀가 나왔던 영화 중에서 가장 예뻐보였다.
뒷얘기 : 영화와 실화의 다른 점 http://lsk.pe.kr/4984
위플래시
박정희를 보았다.
죽을 힘을 다해 99%까지 스프링을 당겼건만 마지막 1%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열정가들에게 뜨거운 공감을 보낸다.
그것을 견디며 인류의 진보에 뭔가를 보탤 수 있었던 영웅들에게도 같은 분량의 '공감'을 보낸다. '감사'는 보너스로!
전력질주는 그 추동 엔진이 자기 것일 때만이 의미가 있다.
삶의 의미, 삶의 가치를 새삼 되새겨보게 해주는 영화.
안경
카모메 식당을 만든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작품이라고 하여 찾아보았다.
역시 그런 풍이다. 고운 봄바람을 즐기듯 놀멍 쉬멍 보면 된다.
아침햇살 환하게 들어오는 게스트하우스가 가장 맘에 든다. 제주에서 보니 더 좋은 듯. 2006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