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애월리 四季

물것들과 한세상

張萬玉 2015. 6. 23. 08:48

1981년 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위장취업'으로 신원을 탈탈 털린 뒤 재기를 위한 신분세탁(!) 목적으로 C출판사에 몇 개월 다닌 적이 있었다.

오늘 포스팅의 제목은 기억마저 희미해져가는 그 시절에 마주쳤던 시의 제목이다.

지금은 실천문학사가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사장님 친구 출판사인 C社의 제작 배포 라인을 통해 문학계간지만 내던 초미니출판사였다.

그 해 가을호 제작중 황지우 시인의 시로 기억되는(아닐 수도 있다. 인터넷 찾아봐도 안 나옴..) 이 시의 초교지를 들여다보다가

재미있는 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만옥이, 결국 못참고 편집부의 정적을 깼다.

 

"파리, 모기, 빈대, 벼룩(여기까지는 작은 소리로) 다 오거라!(이 부분은 엄포를 놓듯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두 번을 낭송하니 나의 의도를 눈치챈 편집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직원들로 구성된 편집부에 유일한 남자사람, 그것도 한참 연로하신 편집장님 이름을 마음껏 부르게 만들어준 마지막 세 글자 때문.

이후 편집장님이 맘에 안 든다 싶으면 여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구절을 읊어대곤 했지.ㅋㅋ

정작 중요한 시의 내용은 생각 안 나지만 이 통쾌한 한 구절과 대범한 제목만은 나의 뇌리에 남아

이후 거친 여행길에서 빈대 벼룩에 뜯길 때에도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요즘 다시 애송하는 이 구절......다름아닌 모기 때문이다.

모기장을 친 실내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밭에만 나가면 따끔따끔! 전쟁이 따로 없다.

흔히 보는 모기와는 달리 쌀알보다도 적고 온몸이 새까만 밭 모기는 순식간에 파바박! 연타를 날리는 게 특징이다.

긴팔 긴바지는 물론이요 팔토시에 스카프, 모기 기피제까지 듬뿍 뿌리고 나가도 무용지물.

잠깐 상추 몇 잎 딴다고 번거로운 무장을 생략하고 나갔다간 바로 산업재해다.

비온 뒤 더 맹렬해진 물것들의 공격...... 인도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던 물것들이 이렇게 무서워지긴 처음이다.

요 며칠은 밭에도 잘 안 나갔다.

비가 오락가락하니 잡초는 마음껏 자라나고 그 잡초들 때문에 물것들은 더 맹렬해지고......악순환이군.

농사 고수이신 이 동네분들이 마당을 시멘트로 싸바르는 이유, 충분히 이해하가 간다.

 

게다가 어젯밤은 요녀석들 때문에 모기들의 무차별공격을 받고 밤새 모기향을 피워야 했다.

 

굽신굽신 공양한 지 3일째.

여전히 발소리만 들리면 도망갔다가 내가 먹이를 내려놓고 뒤로 빠지면 살그머니 나타나 먹어치우고 창문 너머로라도 눈이 마주치면 하악질.

그래도 모기장 여는 소리만 나면 소스라치던 녀석들이, 이젠 모기장 열고 휴대폰을 들이대도 째려보기만 하지 도망치진 않는다.

이 배은망덕 얄미운 것들이 이만해도 고맙게 느껴지고, 언제 내 손바닥에 얹힌 먹이를 핥아먹어주려나 애를 태우고 있으니 참 바보가 따로 없다.

더군다나 먹이도 못 챙겨먹고 그래서 털도 더 듬성듬성해 보이는 가녀린 회돌이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못 떼겠다.  

 

어제 오후 비가 오길래 이사할 때 쓴 플라스틱 박스에 방석을 깔아 피신처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비에 젖은 고추밭을 사수하는 녀석들.

나 먹자고 사뒀던 참치캔도 동이 나버려 얼마 남지 않은 멸치꽁댕 탈탈 털어 박스 안에 뿌려주고 들어와

언제나 입주하시려나, 모기 무서워 밭에도 안 나가면서 창문 너머 보는 걸로는 성이 안 차 애꿎은 모기장까지 연신 열었다 닫았다....

 

어느덧 모기향 자욱한 밤이 지나고 동도 안 튼 새벽인데 녀석들이 냐옹냐옹 신호를 보낸다. 드디어 어젯밤 야음을 타 입주한 모양이다. 

그래그래, 내 얼른 나가서 사료 사오꾸마!!

 

어쩌자고 자꾸 빠져들고 있는 것이냐. 뽀뽀하면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모르냐!

아, 나도 몰랑!   그냥 '물.것.들.과. 한.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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