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이네 일가와 인연을 맺기로 결심한 날이 바로 며칠 전 같은데 꼽아보니 어느새 보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 관계에 미세한 발전이 있었다.
눈 마주치면 가래 내뱉듯 입에 올리는 하악질이야 그대로지만, 그 강도와 빈도가 현저히 약해져 별로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고
개와 고양이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저 불손한 태도를 길들여보겠다던 나의 미욱함도
때로는 살금살금 때로는 뚜벅뚜벅
때로는 나의 臨在를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끈질기게 식사 현장을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만 두고 시크하게 사라져보는 등 며칠간의 실험 끝에
저건 길냥이 생활에서 몸에 밴 행동 이상의, 어쩌면 평균적인 괭이들의 生來的 인사법이려니, 포기할 줄 알게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개族와 고양이族의 동거를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지혜 아닌가 말이지.
이에 더하여 간간이 보내오는 그녀의 신호는 나의 성급한 짝사랑을 섬세하게 길들여가고 있는 중. (윽, 조종간을 뺏겼다)
나의 끈질긴 시선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접근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서면 밥 먹으라고 새끼들을 부르는 소리, 꾸르륵 꾸르륵...(꼭 부엉이 소리 같다)
밥을 주고 돌아서면 내 쪽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뜨면서 가르랑 가르랑...(얘들은 개들과는 달리 먹이에 허겁지겁 달려드는 법이 없다)
심지어 네 다리 쭈욱 뻗고 늘어져 있는 옆을 내가 슬쩍(물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나가봐도 눈 한번 떴다 감고 마니......아흑, 묘은이 망극할 따름.
이 평화로운 동거에 파란이 일어났으니...... 나흘 전 일이다.
녀석들이 요 며칠 집(박스)에 안 들어간다 싶어 깔아둔 방석이나 좀 털어줄까 하고 가까이 가봤더니
비어있는 줄 알았던 박스에 둘째 재돌이가 누워있는데 뭔가 좀 수상하다.
고개를 위로 꺾은 채 네 다리를 쭉 뻗고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것이다. 설마, 설마!!
그랬다. 녀석이 죽어 있는 것이었다. 아, 면대하고 싶지 않은 이 현실.
우리집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빨리 사체부터 치워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다 덜덜 떨린다.
'저 작은 육체에서는 이미 생명이 빠져나갔다고. 한줌꺼리도 안 되는 녀석이 뭘 알아? 얼른 들어내서 일단 신문지에 둘둘 말아......'
냉철하게 굴어보려는 생각과는 달리 몸은 이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반응한다.
맥이 다 풀려 점심이고뭐고 한나절을 늘어져 있다가,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도움 안 되면 응원이라도 얻고자 해보지만
출장중이고 와병중이고 토목공사중이고......멀리 있는 친구들의 단톡방에서는 와글와글 토론만 가득하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라는 둥, 인연값이라 치고 화장을 해주라는 둥.
매립은 불법이고, 매립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묻은 뒤에 그쪽을 바라보는 건 더 쉽지 않을 것 같고,
사체를 들고 화장시설을 찾아헤맬 일도 엄두가 안 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되도록 빨리 이 사태에서 벗어날 생각만... 내가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었나? ㅠ.ㅠ
아무리 엄두가 안 나는 일이라도 스스로 돌파해내는 것 말고는 딴 방법 없다는 걸 깨우쳐주는 게 독거생활의 장점...
결국 인터넷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질녘, 신문지 수의를 입고 새 종량제봉투를 관 삼아 쓰레기무덤에 묻힌 재돌이.
어쩌다 너는 집도 없이 떠돌며 쓰레기를 먹다가 쓰레기 속으로 사라지느냐. 흑흑...
재돌이를 꺼낼 때 나를 노려보며 하악질을 해대던 까칠이와(소오름~!!) 숲에서 입관을 지켜보던 깜돌이와 회돌이...
얘들은 내가 재돌이를 해친 걸로 오해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영 심기가 불편한 데 그것도 모자라
재돌이보다 더 비실비실한 회돌이 녀석마저 종일 무화과 그늘에 축 늘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다.
헉, 저 녀석이 또 내 손을 빌리려고...? (악몽이다, 이건......)
.
.
.
며칠이 지났고 그 사이에 보고 싶었던 벗이 왔다 갔고
토마토는 익어가고 도라지꽃과 채송화가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까칠이는 다시 내가 내놓은 밥그릇에 입을 대기 시작했고
한동안 비웠던 박스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낮잠에 빠진 깜돌이와 회돌이를 보며 나는 쯧쯧 혀를 찬다.
대체 네 녀석들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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