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가 놀러오면서 뭐 필요하냐고 묻길래
재밌게 읽은 책 있으면 한권 들고 오라고 했더니 무려 네 권이나 들고 왔다.
네 권 모두 팥빙수처럼 시원하고 달콤한 책들이라 긴긴 열대야를 헤쳐나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말리와 나'는 동네 까페에서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빠져든 책이다.
마저 다 읽고 싶기도 했지만 (애견가답게) 소장하고 싶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주문을 했는데
비몽사몽 졸면서 클릭을 했는지? 영문 다이제스트판이 왔다. ㅋㅋㅋ
다시 주문을 시도했지만 2000년도 초반에 나온 책이라 절판. 그래서 친구더러 드나드는 길에 한번 찾아봐달라고 했더니 중고서점을 뒤져 결국 들고 왔다.
'읽는 내내 행복해지는 책'이라는 홍보타이틀은 과장이 아니었다.
워낙 개를 좋아하니까 말리의 천방지축 성장과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보다는 말리 주인에게 빠졌기 때문이다.
(말리의 일생과 함께 한) 그의 젊은 시절을, 마치 함께 살아낸 친구 같은 마음으로 따라갔다.
순수하고 유쾌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생을 경영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즐겁고도 감동적인 일이다.
특히 말리의 말년과 말리를 보내는 대목에 이르면, 이 땅에 한 생명이 왔다간다는 것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되새겨보게 한다.
얼마나 허무한지, 그러기에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하라 이야기'와 '흐느끼는 낙타'는 대만 작가 싼마오의 자전적 산문집이다.
보헤미안의 피를 갖고 태어난 그녀는 획일적인 대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세계를 떠돌다가 스페인 남자를 만나 서사하라에 정착했는데
이 산문집들은 사막 한가운데서 사하라위족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방세계 신혼부부의 절대 쉽지 않은 신혼생활을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겠지만(아마도 그럴 것이다. 서사하라의 독립 문제조차도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으니...) 더군다나 때는 1970년대,
참으로 낯설고 버겁기 짝이 없는 이웃들과 그들의 풍속까지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대처해가는 그녀의 재치 내지 지혜로움....
게다가 예사로운 일처럼 '훅!' 들어오는 기상천외한 사건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읽는 도중에 잠시도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상 스포일러 금지. ㅋㅋ 일독을 권합니다.)
'행복한 건축'은 읽는 중이다.
내가 집을 짓는 데 참고하라고 들고왔단다. (거창하게도 흣~)
건축에 대한 철학과 미학의 변천사랄까... 지식적인 측면이 많아 진도는 야금야금, 습득한 지식은 10분 내 망각... 이러면서 읽고 있긴 하지만
첫부분에서 던지고 있는 '건축을 둘러싼 두 가지 관점'에 관한 화두는 그간 내가 가져왔던 '물질생활에 대해 느끼는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이어서
오랜만에 '사고와 함께 하는 독서'를......ㅋ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환경에 우리 자신을 무디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또 한구석에는 우리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우리의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인정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이것이 화두의 시작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은 장식과 설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경멸하면서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에 만족할 것을 강조했다.>
<고대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집이 불타버려 상심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어찌 돌조각과 예쁜 바위를 갈망할 수 있겠는가.">
이미 물질에 지배당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간혹 청교도적인 결벽성에 시달리곤 하는 것은 이런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라 그런지도 모른다.
가끔 이런 철학은 빈한한 시절에 길러진 무취향에 대한 변명으로, 그리고 가끔은 위선적인 꼰대질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 인정한다.
하지만 이 구닥다리(!) 가치관에 대한 긍지가 쉽게 안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ㅠ.ㅠ
<프로이트는 릴케와 함께 이탈리아의 백운암 산맥을 산책하던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을 회고한다. 꽃들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나비들이 춤추었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야외에 나와 기뻤지만 그의 친구는 땅만 보고 걸으며 산책 내내 말이 없었다.
릴케가 주변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중략)
하지만 프로이트는 릴케에게 공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리 곧 스러질 것이라 하더라도 매력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건강의 증표였다.
(중략) 릴케처럼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사로잡힌 사람들은 커튼 조각에서 좀이 먹은 구명을 보고 설계도에서 폐허를 본다.>
나의 허무주의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일찍이는 스러질 것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는 기독교의 영향을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데서 시작되었을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갈아탄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나는 뼛속까지 개인주의자였던 것이다!)
뒤늦게 개인주의자임을 인식해가면서 그에 걸맞는 철학(쾌락주의)을 아무리 장착하려 해도 참으로 몰입이 쉽지 않으니
앞서 언급한 구닥다리 가치관의 영향력도 여전하지만, 그보다는 내 자신 추동력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ㅠ.ㅠ
<반대로 건축을 향한 열정이 극에 달하면 유미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박물관 경비원처럼 얼룩을 찾아 방마다 순찰을 해야 직성이 풀리며, 보기 흉한 전선들을 감추는 작업 때문에 주말의 외출을 포기한다>
워낙 게으른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며(ㅋㅋ) 절대 집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늘 다짐을 한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중략) 층계를 따라 걸려 있는 작은 정물화들은 일상적인 것들이 복잡함과 아름다움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중략)
위층의 텅 빈 좁은 방은 회복을 꿈꾸는 생각들이 부화하는 공간이다.(중략) 집이 거주자들의 병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중략)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고통과 대화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중략)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비극적인 색깔을 드러낸 뒤에야 우리는 삶이 주는 은근한 선물에 시각적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집을 짓겠다고 하니 참고 삼으라고 초대해준 친구의 집.
바쁜 직장생활에도 불구하고 짬 날 때마다 알뜰살뜰 가꾼, 사랑하고 사랑받은 흔적이 가득한 집이다.
혹시 뒤늦게 발견한 나의 정체성에 걸맞는가 싶어(ㅋㅋ) 열심히 찍고 메모하고... 했지만
역시 나는 집을 사랑하고 집으로부터 사랑빋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ㅠ.ㅠ
나는 딱 요렇게만 지을 꺼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것도 제주에 짓는 집인데 멋좀 내보라고들 하지만, 나는 최고의 옷을 캐주얼웨어로 친다.
마당은 관리가 힘든 잔디 대신 돌 깔고 실내장식은 최대한 간단하게 할 꺼다.
하지만 쓸모가 불분명해도 다락방만은 하나 올리고 싶으니, 역시 정체성에 대한 포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
책 얘기를 하다가 집 얘기가 됐다.
더워서 독후감이나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구구절절 인생 얘기가 되어버렸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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