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만남'이란 게 상대방과 나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인 줄 알았다.
헌데, 살다 보니 '만남'이 성사되고 이어지는 과정에서 내 의지가 개입하는 아주 부분적이라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 그럼 나머지는 뭘까?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일단 '인연'이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해두자.
2015년 9월 첫주에 나를 찾아온 인연은 블러그라는 매개체에서 비롯되었다.
솔직이 블러그의 성격으로 보면 나의 관심사나 성향상 우연한 마실이라면 모를까 즐겨찾기할 블러그들은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요동치는 내 블러그와는 달리, 엄마로서 아내로서 정성을 다해 가꿔가는 삶의 궤적이 섬세하게 새겨진 블러그들..)
그러나 인연의 비밀은 나의 선택이 아닌 곳에서도 작동을 한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10년 넘는 세월 동안 블러그친구로 남아주신 왕언니님이 그간의 글들을 골라뽑아 7순기념 문집을 발간하셨다.
내 블러그조차도 게을리 하다 보니 사실 오랫동안 발길이 뜸해져 '블친'을 자처하기도 민망한 처지가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책을 보내주셨다.
감사인사를 남기러 왕언니 블러그에 들렀는데, 달린 댓글로 미루어 제주에 사시는 게 분명한 '세자매맘'이라는 닉네임이 눈에 띄었다.
워낙 블러그 동네가 넓다 보니 왕성하게 블러깅을 하던 시절에도 본 적 없는 닉이지만, '제주'와 '블러그'의 조합이 주는 친밀감에 당장 달려가봤더니
오! 귀농한 지 십 년차, 수천 평의 귤농사를 직접 지으시는 내 또래의 베테랑님이시다.
게다가 친구들 블러그에서 자주 보이던 羅日樂님의 댓글도 보이는데, 그분도 제주에 살고 계신다네. 참 넓고도 좁은 세상.
그렇게 서귀포 마른 하늘에 급번개가 쳤다.
라일락님이 일년살이를 마치고 머지 않아 육지로 돌아가신다고, 청귤 수확으로 바쁜 세자매맘님이 잠시 손이 비워주셔서 이루어진 귀한 자리.
알고 보니 두 분 다 내가 블러그를 시작했던 2004년 이전부터 꾸준히 블러그를 해오신 블러그 선배님들이었다.
연배가 비슷하다 보니 각자가 쌓아온 삶의 내공을 알아차리고 감동하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고
노는 동네는 달랐어도 한 두 다리 건너 블러그 친구들이 겹치기도 하니 그 공감대를 풀어내기에 한나절 수다로는 턱도 없었다.
(생각해봐라, 10년이 넘도록 블러그를 지켜오고 있다니...... 우리 참 징글징글하구나. ^^)
장소는 1차, 2차....... 결국은 세자매맘님의 신효동 농장으로 이어졌다.
세자매맘님은 내 짧은 말로 이리저리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분이다. 직접 블러그를 방문해 만나보실 것을 권한다.
http://blog.daum.net/yeainmam/13727514
관계의 바탕이 되는 신뢰는 일정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
'인연'은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가 격한 공명이었든 무의미할 만큼 미미했든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이 먹어가며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결국 '인연' 위에 세월을 쌓아가는 건 나의 몫이다.
수더분하고 적극적이고 품이 넓고......라일락님이 오늘 내게 남긴 인상은 그랬다. 솔직이 라일락님을 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리하여 오늘부로 라일락님의 블러그에 입문해볼까 한다. ^^ (지금쯤 목포행 배에 몸을 실으셨을까?)
<부록> 괭이들과의 인연(이라기보다는 안부)
새끼들이 젖을 떼기 시작하면서 사료도 조금씩 먹기 시작할 무렵 어미는 새끼들이 먹고 나서야 밥그릇에 입을 댔다.
새끼들이 조금 먹다 해찰을 할라 치면 가르랑거리면서 계속 먹기를 종용하며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동안은 세 마리가 좁은 먹이통에 같이 머리를 처박았고
며칠 가지 않아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어미가 먹이통을 독점하고, 새끼가 근처에 얼씬이라도 하면 새끼를 향해 살기어린 하악질을 해대는 거다.
그 얼마 전에 새끼가 습관적으로 젖을 빨려고 하자 표독스럽게 앞발로 쳐내어 날 놀라게 하더니만......
고양이를 길러본 친구 말에 따르면, 새끼가 젖을 떼고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서열교육을 한단다.
요즘은......
어미고양이가 안 보이고 새끼 두 녀석만 번갈아가며 먹이를 먹는다. 벌써 일주일째다.
어미는 어디로 간 걸까. 나와바리를 넘겨주고 떠난 걸까?
매정한 녀석? 지혜로운 녀석? (자식들 인생에서 좀처럼 물러나지 못하는 한국 부모들보다 고양이가 낫구나.)
집을 떠난 이 어미의 마음이 갑자기 착잡하다. 어서 아들녀석이 장가를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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