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맞서 묵은 영화, 인기없는 영화들을 깔끔하게 구조조정해버린 동네 비디오샾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이 비디오를 친구집에 놀러갔다 드디어 발견했다. 친구가 반환하는 것을 다시 빌려 들고 와 '집중해서 봐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먹을 것 먹고 치울 것 치운 다음 차분하게 시작했다.(볼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보았을 영화의 후기이니 내 마음대로 rewind 해도 뭐랄 사람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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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연극 같은 세트가 나온다. 집과 거리는 분필로 구획되어 있고 모든 건축물들에는 벽도 지붕도 없다. 등장인물들은 분필선을 따라 오고 가며 보이지 않는 문을 여는 시늉으로 드나든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무대에서 진행되며, 관객들은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한 무대에서 다 볼 수 있다(어떤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이 사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도 동시에 볼 수 있는 뜻이다). 게다가 관객들은 가끔 (마치 신이나 된 양)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에서 지켜볼 수도 있다.
영화는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이건 또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각 장은 하나의 상징에 대해 다양한 비유를 곁들이고 있는데 약간은 시니컬하게 느껴지는 나레이션이 줄곧 친절하게 따라다니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의 전개를 도와준다.
프롤로그에서는 20여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와 이 마을의 일상이 소개된다.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clue라고도 할 수 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 없는 몽상가 톰. 그의 머릿속에는 마을사람들의 도덕성을 높이기 위한 '지도자다운' 고뇌가 가득차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매일 밤 '마을회의'를 소집한다.
'도덕적 지도자'를 자임한 톰. 그러나 세상이 자기 그림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위선적인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 교수의 환각 속 인물로도 열연했던 이 남자배우의 이름은 폴 베터니라고 한다.
오는이 가는이가 드문 가난한 마을 <도그빌>에 묘령의 금발여인이 나타난다(의외로 니콜 키드만이다. 니콜 키드만을 이런 영화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고 뒤쫓는 마피아를 피해 이 마을에 은신하고자 하나 손바닥만한 마을의 특성상 주민들의 만장일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 그녀는 주민들의 '도덕성'을 자극하여 주민들의 마음을 사라는 톰의 제안을 따르기로 한다.
도덕적인 결정처럼 보이는 제안이 사실 육체노동이라는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이었음은 시간이 갈수록 명백해진다. 도그빌 사람들은 '봉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녀의 노동에 길들여지고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그녀의 고운 손이 나날이 거칠어질 수록 그녀는 점점 더 도그빌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고(인간에게 '필요한 존재'란 과연 어떤 존재?) '그녀의 집'으로 상징되는 마을 사람들의 認定과 월급을 쪼개 하나씩 사모으는 '도자기 인형' 일곱개 풀세트의 완성으로 그녀의 행복도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 독립기념일 파티... 그녀를 '수용'한 도그빌에서 그녀의 행복은 완성되는 것일까.
그녀를 향해 서서히 잔인한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도그빌 사람들....그녀를 찾는 현상금의 액수가 올라가면서 그녀는 먹잇감을 노리는 인간맹수들의 표적이 된다. (상대방의 약점을 쥔 인간들의 비열함이라니!)
갑자기 빨라지는 카메라웍에 따라 손이 발이 되도록 움직이는 그레이스... 그녀 역시 학대에 가까운 노동에 지쳐간다. 결국 아무리 갈아끼워도 소용없는 오줌 지린 침대시트를 갈면서 선한의지의 표상처럼 보이던 그녀도 흔들리고 만다.
"아무도 여기서 못자!!"
다가올 비극을 예고하는 섬뜩한 그녀의 한마디.....

서서히 악에 받치는 니콜 키드만.... 눈에서 파란 분노의 불꽃이 튀긴다.
앞부분에서 '끈적한 시선'이라는 단어로 그녀의 육체가 노동뿐만이 아니라 쾌락의 용도로 쓰일 것을 암시했던 바, 영화는 드디어 니콜 키드만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한다.
여자를 정복하기 위한 남자들의 구실도 가지가지... 원조교제 하는 아저씨들이 딸네미 같은 아이를 불러놓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좋은 말씀 많이 해준 뒤에 안쓰러워하며 안아준다던가?
사과농사의 의미를 알고 그 결실이 값진 것을 이해한다면서 왜 사과농사 짓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생떼를 쓰던 Chuck은 어거지가 통하지 않자 바깥에 경찰이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그레이스를 덮친다. (관객의 눈에는 다 보이는 이 잔인한 상황 속에서도 마을사람들은 손끝 하나 까딱 하지 않는다.) 마을에 소문이 퍼지면서 그레이스는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고.... 그녀의 행복으로 표현되는 도자기인형 세트는 마을 여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살난다.
마침내 탈출을 결심하는 그레이스... 애인을 자처하는 톰은 그녀에게 탈출할 방안을 내어주지만 어차피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실한 계획.... 트럭 화물칸 사과상자더미에 낑겨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녀 옆으로 갑자기 운전사 벤이 파고든다. 바깥에 경찰이 쫙 깔렸다는 협박을 앞세우고 위험한 화물인 너는 내게 추가요금을 물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사과박스로 꽉찬 비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집요한 강간의 현장은 반투명하게 처리한 트럭덮개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인해 아름답게(!) 연출된다. 잔혹함의 극대화랄까.
흔들리는 사과운반트럭에서 강간당한 후 잠에 빠져든 니콜 키드만...
그녀에게는 "안좋은 일은 금방 털고 앞일만 생각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벤은 그레이스를 다시 마을로 끌고 오고 마을사람들은 아예 탈출이 불가능하도록 족쇄를 채운다. 정해진 수순인 양 그레이스는 그날 이후 마을 여자들의 노예이자 분풀이대상이자 마을남자들의 공공연한 노리개가 되고, 그레이스를 정신적으로 사랑한다는 톰 마저도(유일하게 그레이스와 육체적 관계를 안 가진 도그빌 남자) 그레이스에 대한 죄책감을 핑계로 관계를 요구한다. 절망한 그레이스의 "당신도 똑같다"는 말로 정곡을 찔린 톰은 번뇌 끝에 마침내 그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만다.
여기서 끝났으면 좀 나았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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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의 반전은 내 눈에 좀 어거지처럼 느껴졌다.
겨 묻은 개도 겨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는데 하물며 똥 묻은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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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그리고 집단의 인간성, 그 광기에 관한 인간 실험극...
인간의 이중성, 위선, 탐욕에 관한 보고서...
얼마든지 실화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보는 이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잔혹하고 슬픈 우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리저리 뒤져본 다른 이들의 영화평이다.
나처럼 잠시 인간성에 대해 절망들 했겠지. 헌데 왜 내겐 (나의 소감을 포함하여) 이런 말들이 관객들의 시선, 혹은 위에서 찍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덧없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끝간데 없는 탐욕과 돌팔매질이 난무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세상에서 입다물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져버린 처지에 뭐 새삼스럽게 절망할 것까지야....(다시 잠깐 절망한다.)
나나 잘하자... 너나 잘하세요....
저런 선택의 순간에 최소한 이중성은 드러나지 않도록 관리는 하고 살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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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 대하여 : 라스 폰 트리에
1956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출생. 그가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었다'고 회상한 덴마크 영화학교를 졸업한 후, 5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으며 84년에 [범죄의 요소(Forbrydelsens element)]로 최초의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다.
[범죄의 요소]는 필름 느와르와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들을 섞어놓은 듯한 스타일의 어린이 연쇄살인범 추적극으로서 칸 영화제에서 프랑스 고등기술위원회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단 한번씩만 촬영되었으며, NG없이 2주만에 완성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소위 '초 현실적 스릴러 3부작'혹은 '전후 유럽 3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염병(Epidemic)]과 [유로파(Europa)]를 각각 87년과 91년에 완성하였으며, [유로파]는 그에게 두번째의 칸 영화제 고등기술위원회상을 안겨준다. [유로파]는 컬러 필름으로 촬영된 뒤, 흑백으로 현상하여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부분적인 컬러의 사용으로 유명한 영화이다. 그리고 두 작품 사이에 그는 TV용으로 [메디아(Medea)](87)를 만들어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에 대한 그의 존경을 표시하기도 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81년부터 83년까지 덴마크 코펜하겐의 영화학교를 다녔지만 정형화된 제도교육의 한계를 미리 느꼈으며 자신의 독학으로 영화의 기술을 익혔으며 거기서 얻은 것은 지금까지도 제일 소중한 영화동료들인 편집자 토마스 기슬라슨, 카메라맨 톰 엘링을 만났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기교에 심취한 재주꾼이라는 평가를 받던 폰 트리에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덴마크 TV에서 방영된 [킹덤 The Kingdom](1994) 시리즈. 해외에서는 4부작씩 묶어서 4시간 39분자리 극장판으로 개봉했다. [킹덤]은 코펜하겐에 있는 대형 병원인 킹덤을 무대로 병원의 일상드라마와 유령이야기를 섞은 스릴러이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영상은 여전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들고찍기로 공포 심령미스터리의 정수를 펼쳤다.
그 다음 [킹덤]의 들고찍기의 경험을 백분 발휘한 작품 [브레이킹 더 웨이브 Breaking the wave](1996)는 사랑과 구원, 종교적 정화의 의미를 미묘하게 비튼 멜로드라마로 그해 깐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기교주의를 넘어선 폰 트리에는 영화의 순수성을 되찾자는 작가적 의지를 천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도그마 95"이다. 덴마크의 젊은 감독들을 위주로 한 "도그마 95" 선언은 현지촬영과 동시녹음, 들고찍기,자연조명, 광학작업이나 필터사용금지 등 상업적 조작과 작가주의적 덧칠을 거부한 대안적인 영화만들기를 내세웠다. 98년 칸영화제에 출품된 폰 트리에의 [백치들 The Idiots]와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셀레브레이션 Celebration]이 그 첫 산물이었다.
[백치들]은 기성질서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며 의도적인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을 "도그마 선언"에 따라 거칠고 투박하게 담은 작품이다. 독창적인 이미지와 기교실험으로 표현의 틀을 넓혀온 그는 91년부터 33년간 매년 유럽의 다른 장소에서 3분짜리 화면을 찍어 모을 새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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