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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vile과 함께 빌렸던 비디오다.
이것도 언제적부터 보려고 별렀던 영화인데...(주변에서 공감추천하는 아짐들이 많아서...) 막상 보고 나니 심란하기만 하다. 왜 현실과 이상(그것도 애매모호한 모습의)은 서로 엇박자를 놓으며 인간을... 더구나 발 묶인 여인네들을 희롱하는 것인가. 때로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로 창조한 조물주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볼 때는 니콜 키드만과 줄리엣 무어, 메릴 스트립.... 이 대단한 세 여인들의 연기에 홀렸지만 다 보고 나니 줄거리에 좀 헷갈리는 부분이 있기에 영화평을 한번 뒤져봤다.
혹시 이 영화를 보셨지만 나처럼 어리버리 뒷정리가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퍼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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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에게는 모두 이상이 존재한다.
동성애의 입장에서 버지니아에게는 언니와의 사랑이, 로라에게는 이웃집 여자와의 사랑이, 클래리사에게는 샐리와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런 동성애는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성을 지닌 '이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세 인물들에게는 힘겨운 현실 또한 존재한다. 버지니아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답답한 시골에서의 일상, 로라에게는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결혼 생활이, 클래리사에게는 병들고 괴로워하는 리차드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 사람 모두 이상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함께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우선 버지니아 울프를 보면 버지니아의 언니는 버지니아와는 달리 씩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들과 뛰어 놀고, 새가 죽어도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버지니아에게 있어 강한 언니는 버지니아의 이상향이다. 그리고 언니는 버지니아의 감성적인 면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두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그녀의 감성을 언니는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언니에게는 이제 로라가 있다. 언니에게 버니지아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을 자신과 비슷한 로라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언니는 돌아갈 때 버지니아에게 키스하지만, 서둘러 로라를 챙겨서 떠난다. 이로서 버지니아에게는 이상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남아있지 않게 된다. 즉 그녀가 꿈꿀 수 있는 이상은 그녀에게서 떠나버린 것이다.
버지니아는 언니가 돌아가고 난 후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현실을 상징하는 시골에서의 삶은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자신의 삶이 아닌 것으로 느껴져 그녀를 더욱 미치게 한다. 런던으로 다시 떠나고자 하는 것은 또다시 이상을 갖고자 함이다. 이상을 좇았던 런던에서의 생활은 고통이었지만 그 이상조차 없거나 너무 멀리 있는 시골에서의 현실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실인 남편과의 끊임없는 싸움과 타협 끝에 런던으로 돌아가기로 하지만 나약한 그녀에게 있어 런던은 너무 먼 곳이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의 시골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지, 즉 어떻게 하면 현실과 타협하고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지만, 이상을 잃은 또는 너무 먼 곳에 이상을 두었던 그녀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하게 된다.
버지니아의 언니에게 있어서 버지니아의 존재를 대신 충족시켰던 로라. 로라는 그런 면에서 버지니아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로라에게도 이웃집 여자라는 이상이 있다. 로라는 사교성이 부족한 내면적인 사람이었다. 반면 로라의 이상인 이웃집 여자는 외향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로라는 자신의 이상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가슴 아파했다. 그토록 아이를 갖고 싶어했던 이웃집 여자가 자궁 수술을 받으러 갈 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로라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겨우 개밥을 챙겨주는 시덥지 않은 일뿐이었다. 이에 로라는 괴로워하며 망설인다.
그리하여 이상을 위해 떠나려 했지만 자살을 미루는 등 현실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라는 끝내 자상한 남편과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들을 뒤로하고 현실을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은 이웃집 여자가 기르게 될 것이고 이는 자신의 현실을 버려서라도 이상을 완성시키려 했던 그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 후 늙어서야 그녀는 돌아오지만 늙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도 현실도 모두 그녀를 떠나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라의 아들 리차드. 이상을 갈구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던 리차드도 버지니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신의 이상을 상징하는 연인 루이스와 끝났고 시 속에서마저 이상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현실을 고통 속에서 보내던 그 또한 이상에 대한 갈망으로 버지니아처럼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초점이 되어야 할 사람은 리차드가 아니라 클래리사이다.
그녀에게도 이상은 있다. 그것은 샐리와의 사랑이다. '샐리와 여태 함께 사는 것이 미친 짓 같지 않냐'고 루이스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도 샐리와의 사랑을 유지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샐리와 헤어지지 않는다. 즉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클래리사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했던, 어찌 보면 일상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었던 리차드와의 사랑 즉 현실 속의 작은 기쁨들을 받아들인 여자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러나 리차드는 너무 힘든 존재였다. 에이즈에 우울증까지 있는 그를 감당하는 것은 그를 위해 파티 준비를 하다가 주저앉아 울 정도로 버거운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리차드를 자신의 삶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그리고 리차드의 옛 애인인 루이스와 리차드의 시... 즉 리차드의 이상들까지도 소중히 생각한다. 현실 속에서 생겨난 또 다른 이상까지도 챙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이상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버리지 않았던 그녀는 비록 리차드가 죽긴 했지만 샐리와 딸을 잃지 않는다. 늘 곁에 있던 샐리라는 그녀의 이상도 또 다른 현실인 딸도 리차드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현실에서 상처받은 그녀를 위해 외투를 벗겨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한편 이 영화에는 세 여인의 다른 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나타나 있다. 먼저 영화의 내용 속에서 '파티'는 세 주인공에게 공통적으로 이상과 현실을 매개하는 장소가 된다. 즉 '파티'는 이상을 현실로 초대하고 끌어들이고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기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니의 방문에 준비할 음식들을 버지니아는 직접 준비하지 않았고 그나마 주인의 무관심에 불평하던 하인들이 준비를 다 끝내기도 전에 언니는 미리 들이닥쳤다. 이상을 현실로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로라의 케이크. 이웃집 여자가 로라의 망쳐버린 케이크에 대해 말하자 로라는 케이크를 다시 만든다. 이상을 현실과 맞추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려 했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클래리사는 스스로 모든 걸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준비했다. 게다가 샐리와 루이스가 뜻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이상과 이미 깨어진 이상까지도 함께 '현실'의 한 부분인 '파티'속에서 조화시키려는 배려까지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가지 더, 이 세 여인의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도 이 영화 속에는 암시되어 있다.
먼저 버지니아 울프의 이상인 언니는 런던에 있었다. 버지니아는 나중에 다시 이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런던은 버지니아에게 먼 곳이었다. 상대적으로 로라의 이상인 이웃집 여자는 그 거리가 가까웠으며 클래리사의 이상인 샐리는 같은 침실을 쓰고 있었다. 즉 그녀는 이상을 그녀의 생활 안에 또는 그녀의 현실 가까이에 두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이 영화는 세 명의 여인을 통해 인간이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그것들을 삶 속에서 조율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먼 곳에 이상을 두었고 그리고 그 이상을 잃었으나 그것을 다시 찾을 만큼 강하지 못했던 버지니아의 죽음을 통해 이상이 없는 삶은 곧 죽음이라는, 인생 속에서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의 막강함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강조한다.
또, 이상의 완성을 위해 현실을 버렸지만 결국 죽음 앞에 남은 것은 이상도 현실도 아닌 초라하고 허망하게 늙어버린 자신뿐이었던 로라를 통해 영화는 현실의 소중함도 아울러 일깨운다.
한편 현실 가까이에 이상을 두었으면서도 현실의 삶에 충실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클래리사...이상을 현실과 조화시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결국 이상과 현실을 모두 잃지 않았던 클래리사를 통해 영화는 우리가 보다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버지니아와 리차드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홀로 남은 로라마저 클래리사의 집으로 돌아와 클래리사의 딸과의 포옹을 하게 되는 결말을 통해,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그들의 삶, 그리고 이상과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여러 가지 가치관들을 결국 클래리사의 삶 속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셈이다.
출처 : www.cine21.com antiqusaud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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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ia Woolf의 작품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의 출판 전 제목은 『시간들The Hours』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924년 여름 『시간들』은 『댈러웨이 부인』으로 제목이 바뀌었다.『댈러웨이 부인』의 출판과 함께 사라졌던 또 다른 제목 『시간들』은 울프 사후 60년이 지난 지금 마이클 커닝햄Michael Cunningham이라는 젊은 미국 작가에 의해 새옷을 입고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1998년도 퓰리쳐상Pulitzer Prize을 받은 커닝햄은 울프와는 달리 비평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신진 작가로 커닝햄은 자신의 작품에서 책의 제목만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댈러웨이 부인』에 연루된 모든 요소, 작가인 울프의 내면, 울프가 그 작품을 저술하는 과정, 그리고 그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뒤섞고 해체시켜 60년 후의 세상에 살고있는 인물들로 모두 되살려 놓았다.
2003년 골든 글로브 최우수작품상, 여우주연상 부문 수상한 영화 <디 아워스>의 원작 소설인 마이클 커닝햄의『세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버지니아 울프의『댈러웨이 부인』은 울프가 41살 때 내놓은 장편 소설로, 파티를 준비하는 것이 주요 일과인 하원의원 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어느 하루의 일을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통해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 은 버지니아 울프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로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완성된 이 작품은 울프 자신의 새로운 서술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유사하면서도 울프만의 섬세하고 밀도 있는 세계가 잘 표현된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격.
하루종일 파티를 준비하는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정신 병원에 갇히기를 거부하여 마침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셉티머스의 최종 자살을 큰 축으로, 인도에서 막 귀국한 클라리사의 옛 애인 피터 월시, 셉티머스의 불쌍한 이탈리아 아내 루크레치아, 그리고 클라리사의 처녀시절 친구 샐리 시튼이 등장한다.
출처 : 레포트월드 ( http://www.repor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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