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있던 사이에 낯설게 변해버린 서울역을 잠시 둘러보려고 좀 일찍 집을 나섰는데
구청사 1층으로 가서 KTX 티켓과 간사이 스롯또 패스를 챙기고 나니 어느 새 10시가 넘었다.
* 간사이 패스는 이틀 전에 집으로 발송되어 왔다.
* 구청사는 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보여 하마터면 1층에 있는 홍익여행사를 못찾을 뻔했다.
* 신청사는 국제도시에 걸맞는 화려한 변신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KTX에 오른다. 돌고래처럼 날씬한 자태에 마치 비행기 기내처럼 세련된 내부는 15년 전에 타본 새마을호(통일호?)나 중국기차 밖에 모르던 나를 뚤레뚤레 사방 살피기 바쁜 촌뜨기로 만든다.
역시 돈값을 하는군... 시속 300킬로미터라는 속도감도 느껴볼 새도 없이 천안, 대전 찍더니 벌써 대구란다. 부산 지리도 잘 모르는 데다 승선완료까지 시간도 넉넉하지 않으니 혹시라도 헤맬지도 모르는 시간을 벌기 위해 준비해온 샌드위치로 일단 점심을 먹어둔다.
* 새초롬해 보이는 아가씨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같은 팀일 거라는 짐작이 맞았다.
* 계획과는 달리 먹을 걸 하나도 준비 안 해오는 바람에 기차에서 파는 김밥을 사먹었다.
맛은 있는데 가격에 비해 양이 좀 서운했다. (딱 여섯 개 들었음)
부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20분. 여행사에서 알려준 정보에 따라 지하철로 환승한다.
부산 지하철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평일 낮에도 꽤 붐빈다. 부산 지하철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한번 타봤는데 그때가 1987년이었으니 부산 지하철도 벌써 15년이 넘었군. 하지만 차량은 교체한 지 얼마 안 되는지 비까번쩍하다.
타자마자 내린다. 부산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중앙역...
12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의 육교를 건너는데 비릿한 바다내음과 함께 짙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든다. 이 비현실적인 느낌... 대도시에 바다가 이럽게 근접해 있다니...
* 내 옆의 아가씨가 부산역에서 일행을 만나 셋이 택시를 탔다. 따라서 부산 지하철이 어떤지는
지금도 모른다. ^^
* 부산만 해도 꼭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바다를 마당 삼아 산비탈에 빼곡이 들어선 집들....
이 특이한 분위기를 부산 사람들은 느끼고 살까?
돌아올 때 잠시나마 부산탐험을 꼭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그리운 내 형제여~
(이 가사의 애절한 뜻을 돌아오는 길에서야 절감했음)
왼쪽 건물이 여객선 터미널
터미널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한산하여 ** 여행사 피켓을 든 아가씨를 곧 찾을 수 있었다. 여권 보여주고, 승선 티켓 받고, 출입국 신고서 작성하고, 입국심사 받고... 그리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니 눈앞에 높이 3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여객선이 흰 제복을 차려입은 해군처럼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길이가 160미터에 5000명을 태울 수 있다더니... 과연 멋지군.
* 이 부분은 예상이 틀렸다. 출항시간이 가까워지니 터미널이 미어지게 승객들이 몰린다. ^^
절반은 여행, 절반은 비즈니스... 박스포장된 짐들을 힘겹게 끌고 오가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하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멀리 떠난다는 실감이 가슴 가득 밀려온다. 드디어 현해탄을 건너는 거다. 유행가 가사처럼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싣고....ㅎㅎ
오사카와 부산을 오가는 최초의 우리나라 여객선이라는 팬스타호는 내가 유일하게 타보았던 여객선 상하이-닝뽀 왕복편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가 기다린다. 배 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레스토랑과 쇼핑센터, 사우나에 게임룸까지 갖춰져 있다. 영화에서 보았던 호화유람선처럼....
체크인 하는 것도 호텔처럼 프런트에서 키를 받는다. 4인실 스탠다드 양실이다.
이층침대가 나란히 놓여 조금은 옹색하고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도 없지만 바다야 시원하게 갑판에서 보지 뭐. 방에 샤워장은 없지만 사우나가 무료라니 좀 번거롭지만 상관없다.
배에 타면 먼저 여기서 객실 키를 받는다.
같은 객실에 든 사람은 학생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정주부 같지도 않은 아가씨 둘이 일행 , 그리고 조금 수다스러워 보이는 아줌마 하나. 혹시 ** 여행사 통해서 왔는지 물어보니 세 사람 다 그냥 배표만 끊어가지고 왔단다. 아가씨 둘은 어째 분위기가 영 칙칙한 것이 뭘 자꾸 묻기도 껄끄럽고 아줌마는 짐을 놓자마자 나가버렸다. 아마 다른 방에 일행이 있는 눈치다.
그래, 이 여행에서는 동행을 만들지 말기로 하자. 나도 철저히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는 거야.
* 배정된 방에 들어가보니 이런 황당! 객실에서 남녀 혼숙은 금지되어 있다고 했는데 방문을 열어
보니 시커먼 총각 셋이 일제히 날 쳐다보고 있다. 아, 내 이름이 남자이름 같아서 헷갈렸던 모
양이다. 이것 참 재미있고도 불편하겠군... 하며 프런트에 바꿔달라고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
더니 자기 일행중에 여자가 하나 있으니 방을 바꾸어 줄 수 있느냐고 한다.
그래서 바꿔들어간 방이 마침 아까 기차에서 만났던 아가씨 자매 방이다. 짐을 풀고 있는데 다
른 옆방에서 아가씨 하나가 들어온다. 그 팀도 자매간인데 다른 방으로 찢어졌단다. 이왕 혼자
와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신세 인심 한번 더 쓰자 싶어 또 바꿔줄까? 하니까 괜찮다고 하더니
어영부영 눌러앉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금세 친해져 우리 방은 그냥 5인실이 되
기로 했다. 상냥하고 탐구심 넘치는 이 두 자매팀 덕분에 젊은피를 수혈받은 이 왕언니는 훨씬
유쾌하고 활기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선실 내부... 사진에 보이는 시설 외에 옷장과 코딱지 만한 세면대가 있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운동장만하다. 배에 탄 사람들이 거의 모두 갑판으로 나온 것 같은데 곳곳에 놓인 벤치는 아직도 여유가 있다.
* 타이타닉을 하는 연인들이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못봤다. ^^
노을이 지고 있다. 지는 노을을 보며 타이타닉 폼을 잡는 귀여운 연인들... 제 세상 만난 듯 넓은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사진 찍는 사람들... 바람이 꽤 찬데도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고 즐기고 있다. 갑자기 혼자 앉아 있는 내가 좀 벌쭘해지는 기분이다.
벌쭘해질 틈도 없었다.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 보니 오고가는 사람들과 금방 인사를 트게 된다.
생활한복을 만든다는 내 또래 아저씨, 기모노 스타일을 가미하여 개발한 새로운 샘플을 들고 거래처 개발하러 간다고 한다. 웬지 깐돌이님이 저런 스타일이 아닐까 짐작하게 만드는 젊은오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인데 직접 쇼핑몰을 운영해보려고 시장조사차 떠나는 길이다. 연신 내게 족발과 소주를 권하시는 조그만 할아버지는 딸네미가 오사카에서 민박집을 한다고 하시길래 어디냐고 물어보니 정작 아버지인 본인은 모르시고 그집 단골이라는 아주머니가 가르쳐주신다. ㅎㅎ
20년째 일본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신다는 그 아주머니... 비즈니스로 올 때는 저렴한 민박집에 묵으면서 밥도 직접 해먹고 다니지만 가족과 함께 놀러올 때는 시내 좋은 호텔에 묵으며 편하게 놀다가신다고 한다. 60줄에 들어선 분이 얼마나 젊고 자신감에 넘치시는지....
시니어그룹 뿐 아니다. 창업동아리를 만들어 아이템 하나 들고 거래선 뚫어본다고 길을 나선 팀 등 20대 젊은이들도 꽤 많다. 오사카와 부산이 밀접한 관계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무시로 드나드는 인원이 이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중국 산동 쪽으로 가는 배에도 이 열기 넘치는 삶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과일 같은 간식으로 저녁을 때우겠지만 장거리를 뛰어선지 암만해도 뭘 좀 먹어야 할 모양이다. 가방에 내일 아침까지 먹을 인절미와 컵라면이 있긴 하지만 구경도 할겸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본다.
육개장도 있고 벤또도 있는데 최하가 700엔 이상이다. 컵라면도 있는데 2000원이다(물도 안 부어주는데....) 아무리 배 안이라지만 시매쓰!
* 레스토랑에는 한식세트, 양식세트, 중식 세트가 있다. 700엔. 꽤 먹을 만하다.
컵라면은 까페에서 파는데 100엔, 커피 200~300엔.... 원화로 계산할 땐 0을 하나 더 붙인다.
* 엔화를 사용해야 하는 자판기. 냉동식품이 데워져 나오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주먹밥과 튀김을 먹어봤는데 주먹밥은 편의점 삼각김밥, 닭튀김은 도시락집 것과 비슷하다.
객실로 돌아가보니 역시 수다아줌마는 방에 없고 우울한 청춘 두 사람은 벌써 침대에 파묻혔다. 나도 침대에 파묻혀 시골할머니처럼 보따리에 싸온 인절미를 우물거리고 난 다음 싸우나나 해볼까 했더니 사람이 좀 많은 것 같다. 좀 춥긴 하겠지만 답답한 객실에 다시 돌아가기는 싫어 다시 갑판으로 올라간다.
* 호기심천국 장만옥 여사... 남들 저녁 먹는 시간에 싸우나에 가봤더니 텅텅 비었더라.
이 목욕물이 다 바다로 가겠지 생각하니 웬지 죄짓는 기분이었지만 어차피 모든 물들은 바다로
가는 것이니.... 하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욕조에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호강이... ㅋㅋ 옛날 같
으면 왕비도 못해본 호강 아니더냐.
이 배에서 쓰는 물과 전기들은 모두 자가시설로 공급하는 것이라고 한다. 배설물과 오수는 어
떻게 처리를 할까? 이 의문은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늘 궁금했던 것이었다(아시는 분은
좀 가르쳐주시길 바란다).
자기 전에 싸우나에 간 자매들 얘길 들어보니 그 시간엔 바글바글하더란다. (참고하시길)
저 멀리 불빛이 찬란한 부두가 보인다. 시계를 보니 9시 10분 전.... 시모노세키항 부근을 지나고 있는 모양이다. 잠바를 좀더 두꺼운 걸로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몸을 웅크리고 전자사전에 담아 온 엠피쓰리 음악을 벗삼아 좀더 버텨본다. 아, 춥다... 이 궁상맞은 기분....ㅜ.ㅜ
하도 웅크려 어깨가 아플 즈음 다시 싸우나에 가보니 아무도 없다. 배 안에서 싸우나라니...
싸우나에도 창이 있어 바다를 볼 수 있게 해놓았으니 이런 럭셔리가 어디 있겠냐마는 아쉽게도 바깥은 칠흑같은 어두움 뿐이다. 날씨가 좋은 덕분에 출렁임도 거의 느낄 수 없는 잔잔한 바다 위로 보름을 맞은 달님만이 휘영청 떠 있다.
* 두꺼운 잠바를 가져가서 그다지 춥지 않았지만 갑판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 좀 쓸쓸하긴 했다.
그러나 거세진 바람을 핑게로 갑판에 있는 까페(夢, 유메)에 들어가 작은 병맥주 하나 앞에 놓
고 앉아 있으니 그 궁상맞은 느낌도 꽤 근사해졌다. 밤바다에 떠 있는 화려한 불빛과 반딧불처
럼 깜빡이며 날아다니는 고깃배의 불빛을 보고 있으니 정말 까페 이름처럼 꿈 속에 잠겨드는
느낌....허나 아쉽게도 '오사카의 연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찬스라면 지금이 찬슨데... ㅎㅎ
오사카까지 가는 동안 지나쳐간 바다의 볼거리를 열거하자면
저녁 다섯 시 : 00 항로와 나란히 달리는 대마도(일몰 전이라 볼 수 있음)
밤 아홉시 경 : 관문대교(시모노세키 항 / 위 사진... 잘 못 찍었지만...)
새벽 세 시 : ? 대교(들었는데 잊었음-- 자고 있어서 보지도 못했음)
새벽 다섯 시 : 세토나이카이 항(일출 전이라 잘 보이지 않음)
다음날여덟시: 아카시 대교
방으로 돌아오니 TV에서는 CSI 마이애미가 한창이다.
TV는 일본 채널이 두 개, 한국채널은 KBS 1, MBC, YTN, OCN이 나온다. 우리 방 아가씨들 모두 CSI 마이애미 팬들이라 연속 2회를 내보내는 동안 채널고정이다. 나도 침대에 등을 기대고 마이애미 수사대 시청에 동참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한밤중에 깨어보니 앉은 채로 안경을 쓰고 있다. 비몽사몽 안경 벗고 다시 꿈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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