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가상오사카 견문록 3 - 地鐵男女

張萬玉 2005. 11. 9. 09:14

새벽 다섯시에 미항으로 이름난 세토나이카이에서 일출을 본다기에 긴장을 하고 잠들었는데 인기척에 깨어보니 벌써 바깥이 부옇다. 다섯 시 반이다. 역시 우리보다 더 동쪽에 있는 일본은 해가 빨리 뜨나보다. 서둘러 갑판으로 나가보니 세토나이카이 대교가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오사카항은 의외로 황량한 느낌이다. 오히려 부산항보다 더 썰렁하다.

원래 항구의 느낌이란 게 좀 그렇긴 하지...

지하철 중앙선을 타라고 했던가? 아들 말로는 지하철에 안내판이 아주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니 얼른 지하철 역부터 찾아야지... 그런데 지하철 역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뚤레뚤레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데.... 누가 아는척을 한다. "전철역 찾으세요?"

간사이 지방엔 한국말 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과연.... 반가워 얼른 고개를 돌리니 배에서 본 듯도 한 아저씨 둘이 서 있다. 하나는 반백이고 하나는 대머리 될 준비를 완료한 중년. 

 

"아, 예... 아저씨도 전철 타세요?"

"예. 팬스타에서 내리셨죠?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주오(中央)선 타시려면 저 따라오세요."

 

아이고, 처음부터 너무 쉽다.. 잘 되긴 했지만 계속 이렇게 풀리면 내 취미활동(지도 들고 길찾기)할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친절한 아저씨를 만난 걸 오늘의 '운'이라 여기기로 하고 아저씨들 뒤를 졸래졸래 따라간다. 5분 정도 걷다 길을 건너 좌회전하니 높직이 솟은 전철역이 보인다. 아, 지하철이 아니라 스카이라인이구나....(이 글 읽으시는 분들... 이거 믿지 마세요. 길을 전혀 몰라 그냥 꾸며서 쓴 겁니다. 여행 다녀와서 바로잡아놓을 겁니다.)  

 

일본 전철역은 웬지 상하이 전철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형광고와 함께 전철 노선도가 곳곳에 붙어 있다. 천천히 구경도 좀 하면서 가면 좋겠구만 이 아저씨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광고에 시선 한번 못 주고 종종걸음이다. 아저씨들은 이곳이 익숙한 모양이다. 매표소도 금방 찾고 오사카 1일권 사는 솜씨도 퍽 능숙하다. 개찰구까지 오자 반백의 아저씨는 다른 선을 타야 한다면서 대머리 아저씨와 악수를 나누고 내게도 눈인사를 던지고는 더 앞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어머, 일행이 아니셨어요?"

"아, 예... 룸메이트였죠. 저분은 코스모스퀘어 쪽으로 가세요. 거래처가 그쪽 어디라고..."   

"출장 오신 거로군요. 아저씨는요?"

"아, 전 놀러왔어요. ㅎㅎ 출장은 출장이지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스케줄이 널널해져서... 근데 그쪽은요? 오사카 처음이신가요?"

 

'그쪽'이라는 말이 귀에 딱 걸렸다. '그쪽'이라니...

어찌 들으면 낯가리는 호칭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막 부르는 호칭인 것 같기도 하고... 

그 흔한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건 기분좋은 일이나 세상에, '그쪽' 이라니....(시방 미팅해유?) 암만해도 작업멘트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정작 말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새삼스럽게 아저씨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가운데 V자를 남기며 양쪽으로 벗어지기 시작하는 훤한 이맛전 때문에 양미간은 퍽 단정해 보인다. 눈가에 잡힌 까치발 주름도 좋은 인상에 한몫 하고.... 연한 녹색 와이셔츠에 단조로운 쥐색 조끼와 검은 잠바.... 멋대가리 없는 노티 패션에 한눈에 봐도 샌님 타입인데 목소리나 말투는 어울리지 않게 젊고 경쾌하다. 아무리 봐도 앞뒤 안 가리고 작업멘트 날릴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게다가 내가 어딜 봐서 작업대상자냐. 오바하지 말고 그냥 언어습관이라고 이해해두자.

 

"예, 오사카에 친구가 있어서요..."

(슬쩍 거짓말을 한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자는 암만해도 수상쩍어 보일테니...) 

"아, 그러시군요. 근데 여기 처음이신 거 같은데.... 친구분이 좀 안 나오세요?"

(에공, 들키겠다) "아, 그냥 찾아가서 놀래주려구요. 일하는 애라 바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누가 요즘 외국에서 온다고 마중나오고 그러나요 뭐...그냥 근처에 가서 전화 할 꺼예요."

"하긴 뭐... 일본은 교통편과 주소만 정확하게 알면 집 찾는데 크게 문제 없지요. 어디... 제가 아는 데면 가르쳐드리죠. 전 오사카 시내는 손바닥처럼 환하거든요."

(엑, 이 아저씨... 진짜 이상하네... 당신이 누군줄 알고 내 행선지를 가르쳐드리나?)

"난바 역에서 센니치마에 선으로 바꿔타고 닛뽄바시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럼 나는 난바 역까지 가니까 거기서 환승하는 거 가르쳐드릴께요."

 

대화는 여기까지... 이제 입을 다물기로 한다.

그동안 블러그에 수집해놓았다 프린트해둔 관광자료들을 꺼내 짐짓 눈길을 준다.   

여기가 서울이었거나 상대가 여자였으면 이 수다쟁이 아줌마는 평소 습관에 따라 난바 역에 이르는 30분 동안 적지 않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을 꺼다. 허나 그러기엔 웬지 장소와 대상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사회적 선입견'의 공격을 의식한 경고등이 자동적으로 켜지는 건 확실히 '한국여자'로 살아오며 몸에 밴 습관이겠지. 우쨌든 간에 외지에 혼자 있다는.... '아줌마, 아저씨'라는 조금 칙칙한 시추에이션이 지레 조신한 처신을 하게 만드는 건... 좀 당돌한 편인 나도 어쩌지 못하나 보다. 友意에 넘치는 이 기분좋은 시추에이션이 암만해도 거북하니 말이다. 

 

"관광을 혼자 하실 건가봐요?"

아저씨 목소리가 문득 나의 상념을 깨뜨린다. 이런이런... 배낭여행 온 아이 티를 내고 말았잖아.

"아, 예... 친구가 바쁠 것 같아서 놀러는 혼자 다니려고 해요.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근데 아저씨는 오사카에 자주 오시나봐요. 이쪽에 거래선이라도 있으신가요?"

"사실 이번엔 혼나러 왔답니다. ㅎㅎ

 

이 아저씨는 한국에서 생산한 고급 운동화 원단을 고베의 거래처에 납품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기계를 바꾸고 처음 생산한 제품이 작은 클레임을 먹었단다. 양이 많아서 리콜 하기엔 손해가 너무 클 것 같아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하려는데 공교롭게도 이 일이 발생하기 직전 자기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사장이 은퇴를 했고 그 아들이 책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신임사장을 만나러 한번 오려던 참이었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하여 열일을 제쳐두고 직접 날아왔단다.

 

"먼저 그 아버지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오사카에 이틀 뒤에나 온다는군요. 그래서 내일 일단 고베 들어갔다가 오사카에 나와서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망중한이죠. 오사카에 온 김에 겸사겸사 친구들도 좀 만나고.... 오사카 다닌 지가 10년이 넘었으니 친구들도 꽤 있거든요."

 

처음 보는 나한테 별 얘길 자세하게도 한다. 아, 내가 얘기 중간에 우리 둘째오빠도 그쪽 일을 했다고 아는척을 해서 그랬나? 아무튼 '그쪽'에서 먼저 술술 자기 얘길 하니 나도 저절로 수다가 발동하여 어느새 '남편은 상하이에 있고 나는 한국에서 남편 발령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너무 심심해서 혼자 일본으로 건너왔다....나는 늙은 배낭족이다'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아이고, 푼수! (그 와중에 그래도 오사카에 있는 가짜친구를 고수하기로 한다. 체면이 있으니.... ^^ ) 

  

어느새 지하철은 혼마치역에 도착했다. 야마테 선으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일본 지하철은 우리처럼 직접 환승을 하지 않고 일단 나왔다가 다시 표를 사가지고 환승을 해야 한다. 지하철 일일권을 가진 아저씨와 스롯또 패스를 가진 나는 표를 다시 살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개찰구를 나오면서 검표원에게 확인도장을 받아야 했다. 환승로는 그리 길지 않았고 난바역은 혼마치역에서 딱 두 정거장이다.

내가 가려는 나라행 기차는 환승로를 조금 더 걸어서 킨테츠 난바 역에 있다. 이제 이 친절한 아저씨와 헤어질 시간. 덕분에 30분이란 시간이 후다닥 지났다. 덕분에 일본 지하철 구경을 제대로 못하긴 했지만....

 

"오늘은 친구분 만나고 오사카 성 가실 건가요?"

"아뇨, 나라부터 가려구요."

"왜, 오사카 성부터 가보시죠.. 오사카의 대표 관광지인데...."

"전 원래 맛있는 건 아껴뒀다 제일 나중에 먹거든요. ㅎㅎ 작은 도시 나라에서 일단 워밍업을 좀 하고 나서 넓은 도시에서 활개쳐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재미있으시네요. 그럼 그러시든지...."

 

그러더니 이 아저씨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준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로밍 해뒀거든요. 혹시 친구분을 못만났다든지.... 급한 일 있으시면.....제가 전화로나마 도와드리죠."

(암만해도 이 아저씨, 내 '가짜친구'의 정체를 눈치챘지 싶은데?)

   

무슨 실제상황이 이리도 소설 같은지... 내가 여행 떠나기 전에 구상하던 '소설'이랑 진짜 똑같이 되어가고 있잖은가. ㅎㅎㅎ  고소를 금치 못하며 늙은 배낭족 아줌마는 나라행 기차에 오른다.

 

 

저는 어제 아침에 KTX를 타고 부산에 와 팬스타페리호를 타고 오늘 아침 오사카에 도착했습니다.

배 타고 하는 여행이 지루할 줄 알았는데 배 안의 시설도 다양하고(파도에 따라 출렁이는 욕조에서 공짜목욕과 싸우나를 했음. )  바다풍경도 좋고 룸메이트가 된 젊은처자들도 재미있어서 뜻밖에 아주 즐거운 길이 되었습니다.

원래 오늘 도착하는 대로 나라에 가려고 했는데 배가 1시간 연착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점심 식사 후부터 밤 10시까지 오사카 구석구석을 탐구했답니다.

 

외국에 온 것 같지 않고 꼭 부산에 온 것 같더군요. 주로 지하철로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 지하철이나 비슷해서 전혀 낯설지 않네요. 일단 한자문화권이고 대학 때 조금 하던 일본말도 많이 도움이 되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음식 시켜먹는 것, 길 물어보는 것, 물건 사는 것 정도는 큰 문제 없이 해치웠죠. (영어는 정말 하나도 안 통하더군요. 오히려 상하이보다도 더 안 통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 6개월만 살면 일본말은 아주 유창하게 할 것 같은데... ㅎㅎㅎ

 

오늘 오사카에서 받은 인상은 (일본 전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소박하고 검소하고(곳곳에 오래된 것을 버리지 않고 고쳐쓴 흔적들) 촌스럽고.... 좀더 지나치게 말하면 우리보다 더 가난하다는 느낌이네요.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하더군요. 길을 물으면 손잡고 길모퉁이까지 데리고 가서 가르쳐주고... ㅎㅎ 일단 오늘까지의 느낌은 퍽 호감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사카에는 무시로 드나들면서 보따리장사하는 사람, 장사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는 점이었어요. 대학 갓 졸업한 아이들이 창업동아리를 만들어 아이템 하나씩 들고 거래선 뚫어본다고 단체로 오질 않나, 나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들이 보따리장사 한다고 오가질 않나....  이 열기 넘치는 거대한 삶의 현장을 보면서 또 다른 세계를 느꼈답니다. (아마 산동 쪽으로 가는 배를 타면 역시 이런 현장을 볼 수 있겠죠?)

 

또하나 재미있는 건 거리를 걷다 보면 한 중 일 삼국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이 정말 크다는 걸 실감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대해 비교적 배타적이지만 상하이에서 지대한 일본의 영향을 느꼈듯이 오사카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지대한 영향력을 쉽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죠. 중국음식점과 중국식 점포도 눈에 많이 띄고 중국사람도 많고, 특히 한국사람들 같으면 쯔루바시라는 동네에 모여 살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큰 주거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이 부분도 잘 살펴보면 뭔가 재미있는 연구과제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오사카 지하철을 완전히 마스터하다시피 하면서 너무 다리를 혹사해서 관절에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일은 교토 모레는 고베를 탐구할 거예요. 글피 오후에 배를 타고 그글피에 부산항에 도착하지요. 민박집에 PC방이 있길래 오늘 하루를 정리도 할겸 간단히 소식 전합니다. 서울에 돌아가서 다시 연락할께요. 컴퓨터 사용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