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시내를 벗어나니 창밖에는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비슷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추수를 마쳐 조금 휑하지만 반듯반듯 단정하게 구획된 논들과 가끔 나타나는 소박한 양옥들이 예쁘다.
곧 킨테츠 나라 역이다. 40분 걸렸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먼저 분수광장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에 바로 예쁘장한 오층탑 탑신이 보인다. 흥복사다. 저긴 돌아오는 길에 시간 나면 들러야지.
나라는 일본 최초 국가의 도읍지였고 백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서너 시간 정도 할애하여 맛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지만, 원래 대도시보다는 걸어다니면서 돌아볼 수 있는 소도시를 더 선호하는 편이니 어쩌면 어슬렁거리다가 잡혀서 하루를 모두 줄지도 모르겠다.
굳이 인포메이션 센터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장난 삼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안 되는 일본어를 한번 써먹어보기로 한다.
"나라켄호루와 도꼬데스까?"
"$%@*$%#&@_!"
(ㅎㅎ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듣는 게 중요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못 알아듣는다는 걸 금방 눈치챘는지 유창한 영어로 길을 가르쳐준다. 할아버지, 못알아들어도 상관없어요. 할아버지 손가락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그래도 나는 굳굳하게 "아리가또오~" 한 마디 외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라 현청은 별볼일 없는 작은 건물의 옥상일 뿐이지만 여기 올라가면 나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여 올라가보려고 한 것이다. 과연.... 높은 건물 없이 올망졸망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나라여대로 추정되는 대학 건물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깊은 숲에 대형관람차가 머리를 내민 것 보면 아마 놀이공원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앞쪽으로는 제법 근사한 고층건물들도 조금 보이고 그 뒤에 울긋불긋 단풍 섞인 고운 숲과 사찰이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하, 저게 바로 동대사렷다?
고맙게도 날씨가 좋아 하늘도 파랗고 바람도 시원하다.
현청에서 내려와 동대사 쪽으로 걷다 보니 사슴으로 유명한 나라공원이 나타난다. 종종거리고 다가드는 예쁜 아기사슴만 있는 게 아니라 늙어서 꼼짝도 안하고 눈만 꿈뻑이는 게으른 사슴, 애꾸눈 사슴, 털이 더러운 사슴... 생각보다 꽤 많다 있다. 입을 오물거리고 다가오는 아기사슴 머리 한번 쓸어주고 사진 몇 장 찍고 잠시 벤치에 앉아 먹이를 사서 사슴에게 주는 사람들 구경을 하다 동대사로 향한다. 현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렸다.
동대사에 도착하니 여행온 아이들로 붐빈다. 동대사는 밖에서 바라본 모습만으로도 압도당할 정도로 웅장하다.
우리나라에 단군왕검의 백두산이 있다면 일본에는 나라(奈良)가 있다. 서기 710년 겐묘 천황이 나라를 수도로 정하면서 시작된 아스카(飛鳥)시대는 75년이란 짧은 기간으로 끝났지만 고대 일본의 최고 번성기를 구가했다. 백제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이 컸기 때문에 아직도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국가'를 뜻하는 우리말 '나라'(奈良)가 이곳의 이름이 되었단다) 오래된 신사와 불상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급 문화재들이 거의 손실없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의 동생 제명여제가 그 기반을 닦고 한창 전성기를 이루었던 곳으로 백제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일본을 다스렸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여제의 둘째 아들 대해인이 있었지만 그는 백제와의 인연을 끊고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칭하고 독자적인 정치를 수행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나라 역사와 단절하게 되었다.(진짜?!)
경주의 석굴암 불상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좀더 무서운 대불을 모신 대불전... 이것이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지. 뒤로 돌아가니 구멍뚫린 기둥이 하나 서 있다.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간의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수학여행 온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연신 들락날락한다.
나라는 아기자기하지만 중국의 古都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조금만 걷다 보면 사찰과 전통찻집, 잘 정돈된 숲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계속 돌아다녀도 괜찮겠지만 이 정도로 하고 그만 오사카로 돌아가야겠다. 오늘 저녁엔 오사카 번화가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려야지.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식당에 들러 진열된 플라스틱 우동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요기를 한다. 600엔... 생각보다 가격이 괜찮군. 맛은 한국에서 먹는 거나 비슷하다.
다시 난바역으로 돌아오니 네 시 가까이 되었다. 일단 숙박지에 체크인 하고 좀 씻고 나와야겠다.
난바 역 환승로를 걸어 千日前線(센니치마에)을 타고 日本橋(니뽄바시) 역에서 하차, 10번 출구로 나와 직진한다. 세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랬지. 길을 건넌 다음 다시 횡단보도를 세며 걸어간다. 다섯번째 횡단보도 요시노야라는 주황색 간판이 보이는 데서 좌회전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좌회전하여 직진하다 도시락집이 보이면 우회전... 우체국이 보일 때까지 걷다가 좌회전....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거리다. 여기가 혹시 전자상가로 유명한 덴덴타운 아닌가? 밤에 나와보면 굉장하겠는데?
아, 보인다, 오사카 하우스! 한글을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
길 모퉁이에 서 있는 7층짜리 새 건물이다. 프런트에 앉아 있는 건 예상대로 한국 아저씨...
작지만 깔끔한 4인실에 배정을 받는다. 방에는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왔다. TV도 있고 간단한 취사도구와 개스레인지, 밥솥까지 있네... 마치 콘도에 온 것 같다. 샤워를 하려고 욕실문을 여니 샴푸, 비누, 치약까지 갖춰져 있고....싸구려 상품이라 각오를 하고 왔는데 예상보다 숙박시설이 괜찮다. 확실히 일본은 일본... 중국 여행지와는 비교가 안 된다.
아마 단기어학연수생들도 묵고 있는 듯 라운지엔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이 인터넷을 하고 있다. 음, 밤엔 저기서 블러그를 하면 되겠군. ㅎㅎ 아저씨도 친절하고....
앞으로 나흘간은 여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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