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고 새로워진 기분으로 오사카 하우스를 나선다.
사카이스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니 黑門(구로몬)시장이 나온다.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사카 최대의 재래시장이란다.
반투명 플라스틱 지붕을 이고 검은글씨를 쓴 헝겊을 처마에 매단 작은 가게들이 줄을 잇고 있는 골목을 따라 걸어가본다. 이 시간이면 파장이겠지 했던 예상과 달리 저녁 찬거리 준비하러 나온 주부들로 시장은 제법 붐빈다. 야채나 생선은 한국이나 비슷해서 그다지 신기할 건 없지만 소시지, 장아찌 등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파는 가게 구경은 꽤 재미있다. 모찌 시식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 속이 비칠 정도로 피가 얇은 모찌 조각도 한번 집어먹어보고 장난삼아 우메보시(매실장아찌)도 조금 사본다. 200g 포장에 350엔이다. 중국에서 어학연수할 때 일본 친구가 '아껴두고 집 생각 날 때마다 조금씩 맛본다'던 진한 자주색 우메보시.... 여기 와보니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 종류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냥 먹기에는 거북한 신맛이지만 김밥 쌀 때 와사비 첨가하는 식으로 조금 첨가하면 독특한 맛이 난다고 하니 돌아가서 한번 해먹어볼 생각이다.
길 건너 주방용품과 식탁용품을 파는 道具屋(도구야) 상가에 가볼까 하다가 직업은 못속인다고 괜히 쓸데없는 쇼핑에 쏠려버릴지도 모른다 싶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다. 오사카의 밤은 우메다역 아니면 난바역 주변이라니 한 정거장 떨어진 난바역에서 시작해볼까.
화려한 네온사인이 어두워져오는 거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빨간등과 파란등이 번갈아 세워진 도톰보리 하천변에는 '5대극장'이라고 불리는 연극 전용극장이 처마를 잇대고 늘어서 있다. 여기가 '가미가타' 예술을 선도하고 있는 '연극의 거리'구나.
오늘도 가부키 극장들은 모두 환하게 불을 밝히고 성업중이다. 궁금증에 한번 기웃거려보긴 하지만.... 웬만큼 일본물이 깊이 들지 않고서야 가부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중국에 오래 살았어도 경극을 좋아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처럼....
공연장 가까운 곳에서 일식뿐 아니라 중화요리, 이탈리아풍, 프랑스풍, 독일풍 식당들, 여기에 한국음식점까지 가세하여 기세등등하게 번쩍이는 대형간판을 뽐내고 있다. 저렴해 보이는 선술집과 포장마차식 노점상도 즐비하다. 오사카를 소개하는 사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큰 게 간판, 큰 북을 등에 업은 광대인형... 정말 사진 그대로군. 여기가 그 유명한 쿠이다오레(食い倒れ = 먹고 죽는) 거리인 모양. 나도 어느새 그 사진 속에 있다. ㅎㅎ
하지만 나는 소문으로만 들은 음식값에 지레 겁을 먹고 포장마차에서 타코야키 하나를 사들고 도톰보리 천변에 걸터앉는다. 낙지조각과 마른새우, 가다랭이 가루를 넣고 즉석에서 구워주는 타코야키... 600엔짜리 1인분 포장... 양이나 맛이 딱 내 취향이다.
네온사인으로 물든 도톰보리 강... 도심 속 하천이라는 점에서 청계천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청계천보다 폭이 조금 넓을 뿐인 그 하천에는 유람선이 돌아다닌다. 물은 그리 깨끗하지 않다는데 밤이라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하천 청소를 하는데 자전거에 가전제품까지 나왔다지.. ㅎㅎ 그래도 오사카 홈팀인 한신타이거즈가 우승할 때마다 청년들은 이 구정물에 뛰어드는 객기를 부린다고 하니 도톰보리야말로 오사카 사람들의 마음에 흐르는 '고향의 강'인가보다.
도톰보리 강을 가로지르는 에비스바시 다리를 건너가니 미도스지가 나온다.
에도시대부터 유곽과 요정이 밀집해 있었다는 이 거리는 지금 세계적 브랜드 직영점들이 불을 밝힌 유행과 패션의 거리로 변신해 있다. 이 길을 따라 신사이바시 역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도로 건너편 쪽으로 BIG STEP이란 대형간판이 빛난다. 저기가 캐주얼 패션의 최첨단을 걷는다는 '아메리카 무라' 지역인가보다. 젊은이 취향의 헌옷 전문점, 액세서리 전문점, 캐릭터 상점, 세련된 까페와 부띠끄들이 혼잡할 정도로 빡빡하게 들어서 있고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을 겨냥한 백엔샵과 DVD 판매점도 많다. 아들넘 선물로 뮤직 비디오나 하나 살까 기웃거려본다.
어차피 패션가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소화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므로. ^^).... 계속 걷는다. 혼자 걷자니 웬지 좀 허전하군.
거리의 네온사인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하여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 서울보다 오사카의 밤은 일찍 오는가보다. 거리는 천천히 어둠에 빠져들고 요란하게 번쩍이는 빠찡코 불빛만 남는다.
종아리에도 슬슬 신호가 온다. 이제 아사히 맥주나 한 캔 사가지고 그만 돌아가야지.
내일은 교토 하루일정. 류진온천까지 들를 수 있도록 일찍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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