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끼리라도 같은 직장을
다니거나 같은 동네 살거나 등등 "같은" 것으로 묶인 인연이 해체되어버리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은 친구라고 부르기도 서먹할 정도까지 될 수 있는
게 인간사.
어릴 적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생각을 공유하는가에 따라 친구의 거리를 결정해버리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 자기 원하는
행동반경 내에서 살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멀어져간 친구가 그리울 때는 그냥 알았던 사람과 친구가 어떻게 다른지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해외에서 사귄 친구들은 정들만 하면 떠나고, 떠난 뒤에는 바다가 길을 막는 대로 연락을 게을리하다 마음마저 멀어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나 비슷하다.
어학연수할 때 점심 먹고 오후 늦게까지 남아 공부짝이 되어주었던 M이 생각난다.
나의 푸다오 선생님이자 친구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蔡老師 생각도 나고.. 거만한 노랑머리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켜준 R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녀는 이미 오십도 훨씬 넘은 중년이다. 누가 서양아줌마 아니랄까봐 굉장한 거구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얼핏 보면
무섭기까지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보기드믄 멋쟁이다.
얼굴, 특히 눈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는 걸 그녀를 알게 된 지 석달
만에야,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알게 되었다(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제아무리 젊었을 때 예뻤던 여자, 지금도 그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우아한
여자라도 성적인 존재로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그녀가 예쁘다는 느낌이 들어 눈여겨보니 살짝 치켜올라간
눈매와 검은 눈동자가 생기기도 매력적으로 생겼지만 특히 풍부한 표정 때문에 더 매력적이었다.
내가 본 그녀의 첫모습은 최고의 자질을
갖춘 영어교사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심성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에 더해 그녀는 비영어권 아이들의
언어습관과 사고방식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더해 유머감각도 풍부하고 인내심도 많은 데다 폭넓은 독서로 쌓은 박식함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녀와 나는 서로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영어 써먹을 기회를 주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나. 그녀가 왜 자신의 영역에 내 자리를 내주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영어가 짧아서 말하는 것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한 것이 그 수다쟁이 아줌마를 기쁘게 해주었는지.....
어느날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나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또다른 세계를
발견했다.그녀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얘기하면서 습관적으로 만화풍의 그림을 슥슥 그려댈 때부터 솜씨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가보니 이방
저방에 수십여 점 표구 완료된 작품들이 전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도구는 단순한 색연필인데 주로 중국의 수공예품들을 그린다. 수놓은 신발과
당장, 칠보주전자, 도자기 등등... 서양의 느낌과 동양적인 소재가 조화되어 느낌이 매우 독특했다. 짬짬이 그린 작품들을 가지고 첫 전시회를
한다고 했다.
3년 전 가을이었던가. 드디어 조그만 성당건물을 빌려 시원찮은 조명 대신 촛불을 밝힌 소박한 전시회가 열렸다. 벗들이
관람객의 주류를 이룬, 마치 여고시절의 시화전이나 국화전시회 같은 소꼽놀이 분위기였지만 그것이 그녀 나름의 중국생활을 즐기기 노하우였던 것
같다.
그녀는 취미로 시를 쓰기도 하지만 한시를 영어로 옮기는 것도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천을 보면 중국은 천값이
싸서 좋다면서 얼른 한감 떠둔다. 짬날 때 히피풍의 원피스도 뚝딱뚝딱 짓고 커튼도 만들고 잠시도 쉬지 않는다. 혼자 사니 요리를 자주 하는 것
같지 않지만 잊어버릴만 하면 한번씩 포도주 한잔 하자고 불러서 가보면 후추를 직접 갈고 모든 소스를 직접 만들 만큼 요리에서도 예술을
추구한다.
그녀의 집은 정갈하고 소박하고 편안하고 낭만적이다. 어디 주워온지 모를 싸구려물건들이 그녀의 손을 거쳐 ethnic한
장식소품으로 변신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이다. 서양사람들이 다 그러는지 모르지만 식탁에 촛불을 켜고 음악을 대령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녀는 아프리카 음악을 좋아한다. 쿠바음악, 아니면 중국 전통악기 연주.... 메뉴도 다양하다. 평소 잘 접하지 못하는 문화에 매료되어
그녀와 함께 하는 저녁식사는 한밤중까지 이어지기 일쑤다.취향도 취향이지만 내가 그녀를 xian慕하는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다.
그녀는 사랑의 힘겨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이 이끄는 가시밭길을 기꺼이 가고 있다.
그녀가 내 나이쯤 되었을 때
그녀의 가정에 영화 American Beauty와 흡사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자식들도 장성하여 다 떠나고 두 사람만 남은 가정은 의미를
이제 잃었고 이제 스스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했던 R은 대학시절 전공을 하면서 꿈꾸어왔던 중국으로 날아왔다.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만리장성에서 이혼도장을 찍은 뒤(하필 만리장성이냐) 중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중 그녀는 함께 공부하던 가난한 아프리카 同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미 아프리카에 부인을 둘 가지고 있는 이 10년 연하의 애인은 매일저녁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결혼해달라고 졸랐고 (그 나라 남자들은
사랑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그녀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국비장학생이었던
남편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여기 남아 주업과 부업을 오가며 고달프게 뛰어서 그의 열명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있나.....
그녀와 가난한 애인은 1년에 한번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컴퓨터, 전화도 없는 곳에 사는 애인은 그녀가 보내는 연서에
답하기 위해 두 시간이 넘는 도시로 나와 fax를 이용하는데 fax 비용조차도 없어 그녀를 외롭게 한다.
그녀의 견디기 힘든
외로움은 내가 몰래 엿본 것이고 그래도 그녀는 씩씩하게 홀로라는 감정을 견딘다. 나에게 여름과 겨울 대신 건기와 우기가 있는 아프리카 얘기를
자주 한다. 화상 입은 큰아들 얘기랑 새로 맞은 서양부인을 쫓아다니며 먼지를 털어대는 첫째부인 얘기... 비용이 많이 들어 EASTER 휴가에도
크리스마스 휴가에도 가보지 못하는 그곳이 그리워 구걸하는 아이를 보면 homesick에 걸린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그러나 곧 털고
일어나 아이들 가르칠 준비를 한다. 그녀의 나이가 지금 쉰 넷이다. 믿어지는가..
그러고 보니 이 친구와 통화한 지도 1년 가까이
되어간다. 너무 오래 혼자 둔 것 아닌지... 저녁에 한번 불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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