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7080-2 : 일류대 컴플렉스의 족쇄를 차고 대학문턱을 넘다

張萬玉 2006. 3. 20. 08:36

일류대학이 성공적인 인생이나 인간의 품질과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요즘 세상에선 이미 상식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엔 흔들릴 수 없는 사회적 통념이었지. 아직도 기성세대의 의식 속에는 그 질긴 뿌리가 살아남아... 학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돈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화제.... 학벌 얘기를 드러내놓고 하는 사람은 대단히 유아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청춘의 문턱을 넘기 전에 감히 이 금기의 화제를 건드리기로 한다. 내 인생행로에서 대학의 선택은 상당히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긴 싫지만) 마음 깊이 묻어두고 완전히 아물 때까지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던 상채기였기 때문에...

이제와 돌아보면 이같은 '마이너 리그'의 해묵은 열등감뿐 아니라 '메이저 리그'의 편협한 斜視조차도 완전한 치유에 이르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한 우리시대의 고질병인 듯하다.  

 

아무튼 열아홉의 만옥이, 당시에는 인생의 이 중요한 통과의례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겄다.  

내가 꿈꾸었던 대학은 서양적인 이미지가 강한 연대였다. 영어에 미쳐 있었고 팝송과 영화잡지에 빠져 있던 소녀에게 연대는 고리타분한 서울대보다 더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연대 안되면 서강대를 가야지.... (역시 영문학이 강한 학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비고사 250점대였으니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꿈처럼 보였으나 당시 가난이 바닥을 쳤던 우리집 형편으로는 당장의 입학금조차 대책이 없었으니...자기 힘으로 자기 길을 개척해온 우리 형제들의 전례에 따라 나도 내 힘에 맞는 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같으면야 첫 등록금만 빌려주면 몸이 뽀샤지게 알바를 해서라도 내가 다니고 싶은 학교에 다니겠다고 여기저기 개겨봤겠지만 어린 내겐 신문에 난 4년 장학금 보장된 특차생 모집공고가 더 빨리 눈에 들어왔다.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학교가 어떤 성격의 학교였는지 내가 선택한 학과가 적성에 맞는지 심지어 그 학교가 전기인지 후기인지도 모를 정도로 대강 살핀 뒤 딱 이틀 고민하고 원서를 넣었다. 비슷한 레벨의 비슷한 조건을 내건 학교들 가운데 그 학교를 고른 것은 일단 학과의 이름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아직 개척의 여지가 많은 학과이니 열심히 공부하면 향후 모교에 교수로 채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거라는 큰오빠의 조언도 작용을 했다. 예비고사 점수로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치르는 본고사에서 내 아킬레스건인 수학점수의 반영률이 낮은 것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겠지.   

 

당시에는 단과대학(college)으로서 학생수도 많지 않아 세간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얌전한 여대....

사실 설립자이자 학장이었던 고황경씨가 육성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처럼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할 여성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知라는 덕목 이상으로 중시하는 德과 體의 덕목을 교육과정에 반영하여, 2년간의 의무적인 기숙사 생활과 3개월의 실습주택 입주, 다양한 체육과목의 이수, 채플 참석률 등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좀 특이한 학교였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당시 세간에는 양가집 규수들을 현모양처로 키워내는 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듯....       

그러나 나는 학교의 그런 면면이나 제도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었던 듯하다. 그저 남녀공학이 아니라 서운하군... 그 정도였던 것 같다. ^^  

 

아무튼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것도 수석합격이었다.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우리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 아들은 일차 불합격 소식을 들었다. 어렵게 아들의 재수 뒷바라지를 하던 홀어머니의 대성통곡 하는 소리를 들으니 나의 합격이 자랑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엄마가 장만해준 새옷을 입고 신입생 대표 선서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던 날, 내 마음에는 '그래도 대학은 다닐 수 있게 됐잖아'라는 위안과 '시원찮다. 잘못 생각했나봐....'하는 후회가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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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니 자조적인 문투가 혹시 동문님들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지 걱정된다.

허나 이런 문투는 '학벌에 대한 집착'이라는 사회적 고질병을 앓았던 사람의 심리를 여과없이 그려낸 주관적 묘사일 뿐임을 이해해주시길... 

이 고질병은 두고두고 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다가 몇 번의 계기로 인해 씻은듯이 없어지게 되는데 그 대목에 이르면 오해가 있었던 분들도 마음을 푸시리라고 여기고.... 그냥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