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7080-3 : 태능골의 봄

張萬玉 2006. 3. 20. 20:35

뺨에 스치는 바람은 쌀쌀해도 앙다문 꽃망울에 봄기운 가득 넘치던 삼월의 이른 아침...

새벽잠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기숙사 뒤쪽 오솔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When it's springtime in the Rockies... I'll be coming back to you..."

상큼한 멜로디에 약간 요들 비슷한 발성이 섞이는 이 노래... 옛 생각에 한번 불러보니 오늘같은 아침에도 아주 잘 어울린다. 추억의 노래에 실려 내 마음은 어느새 봄이 오는 30년 전의 태능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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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여대생 기숙사'類의 제목을 단 19禁 영화가 유행한 적도 있었지만... ㅎㅎ

내 대학생활 캠프가 차려진 '여대생 기숙사'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버하자면 '수녀원' 같은 분위기였달까...

 

2학년 언니 두 명에 신입생 두명... 이렇게 네 명이 한 방을 배정받아 한 학기를 같이 지내게 되는데, 이 '방 식구'라는 단위는, 하나의 수저통에 수저를 함께 담아두고 아침과 저녁을 함께 먹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다른 여대에 비해 우리학교 출신들이 '언니', '동생'을 몹시 찾는 이유는 아마 이 특이한 훈련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언니들은 동생들에게 미팅을 주선해주고 미팅 나가는 동생들에게 예쁜옷도 빌려주고 미팅 다녀온 동생들의 상담도 해준다. 가끔 비공식적으로 대여섯 명이 한 식구를 이루는 방도 있다. 방 식구들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여 매일 야간점호 끝나기 무섭게 베개를 들고 오는 녀석 때문에...^^       

 

기숙사라면 당연히 규율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규율은 '숙박시설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좋은 생활습관과 인간관계의 확립을 위해 기획된 '훈육' 개념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엄격했던 것 같다. 밤 9시 50분에 점호, 10시가 되면 소등이다. (아니, 벌써!!) 소등 후 점등이 허용된 기숙사 내 독서실은 일찍 자기 싫은 청춘들로 늘 붐볐으며, 불은 껐으나 수다를 통제할 수 없었던 방은 자주 '심처녀'(사감)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무단외박과 무단외출은 물론이요 귀관시간에 5분만 늦어도 벌점... 벌점이 쌓이면 외출 혹은 외박금지를 당하고 그 벌점이 쌓여 일정 점수를 넘으면 졸업에까지 영향을 준다. 그러니 귀관시간(9시였던가?)이 가까워지면... 특히 외박이 허락된 주말을 지내고 돌아오는 일요일 밤엔, 수십명의 여학생들이 학교 정문부터 강당에 이르는 오르막길을 숨이 턱에 닿도록 필사적으로 뛰는 풍경이 참으로 볼만했다. 

 

점호는 아침에도 있었던 것 같다. 몇 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침점호 끝나면 머리에 수건 두르고 칫솔 물고 이방 저방에서 쏟아져나오는 애들.(한 층에 공동 화장실과 세면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샤워는? 암만 생각해도 기숙사에서 목욕한 기억은 전혀 없는 게 이상하다. 혹시 아예 안하고 살았나? ㅋㅋ) 곧 이어 재깔재깔 수다떠는 소리, 딸그락딸그락 수저통 소리를 싣고 식당으로 향하는 명랑한 발소리... 그렇게 기숙사의 아침은 시작된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가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테니스 연습을 하거나...친구 방에 가서 수다 떨거나....학교 밖으로 나가봐야 정문 건너 소라다방(지금도 생각나는 조그마한 주인할머니... 지금은 다방문을 닫고 우리 학교 쪽에 소라분식을 내셨다고 한다)에서 죽치거나 인근 푸른동산이나 태능으로 놀러가는 정도... 청량리를 거쳐 명동 중앙극장을 한 바퀴 돌아오던 45번 버스도 휙휙 지나다녔지만 평일에는 귀관시간의 압박 때문에 멀리 안 나가고 대개 학교 주변에서 놀았던 것 같다. 미팅을 해도 주로 이쪽으로 불러들여 했던 것 같고...     

  

당시 여대생들 지금과 비교하면 진짜 수수했다. 색조화장 하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졸업반 정도나 되어야 시작하곤 했지) 로션에 청바지, 티셔츠면 끝. 헤어스타일도 커트나 긴 생머리가 주종이고 퍼머도 드문 편이었다. 액세서리나 스카프 하나만 달아도 멋쟁이 축에 속했지.

 

 

우리 과에서 처음으로 갔던 MT 사진...새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청 촌스럽지만... 성형할까 카드빚을 내서라도 명품 살까 고민하던 애들은 없었으니 

지금보단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학교 옆에 있는 유원지 푸른동산(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에서 찍은 사진.

저 초록색 투피스 입은 애 헤어스타일 좀 봐라. ㅋㅋ (비호감?)

그래도 저 투피스가 난생 처음으로 배정받은 내 몫의 새옷이다. 동네 양장점에서 맞췄는데 그래뵈도 멋을 부린다고 더블칼라 더블버튼에 스커트에도 앞주름 두 개를 넣어달라고 했다. 

보라,셔츠와 투피스의 저 대담한 보색 대비!! 당시에는 속에 입은 셔츠의 칼라를 저리도 대담하게 빼내어 입는 게 유행이었다.

 

옆에 앉은 흰 원피스 미녀는 '신기명기 내 눈썰미' htttp://blog.daum.net/corrymagic/1117360에 남편을 출연시킨... 바로 그 친구다.

 

 

1학년이었을 때는... 최소한 첫 학기에는 학교생활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무한자유, 무한낭만의 헛꿈을 꾸는 스무살의 끓는 피는 고등학교의 연장 같은 주입식 수업과 '바른생활' 모드가 지배하는 학교분위기에 대해 본능적으로 역류하는 게 당연하지. 그러나 '긍정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나는 부푼 풍선에서 바람 빠져나가듯 하는 희망의 꼬투리를 꼬옥 눌러잡고 일단은 범생이 노선을 걸었다. 입학 때 받았던 기대를 의식하기도 했겠지. 

 

입학하고 두 주쯤 지나니 자기네 서클(요즘말로 동아리)에 들어오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KUSA 들어라, '지역사회연구회'들어라, 탈춤반 들어라....    

내가 들고 싶었던 서클은 영어회화 서클이나 지적으로 자유로운 (사실은 '비판적인'-- 당시 이런 개념이었는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독서토론회 같은 것이었는데 탐탁해 보이는 서클이 없었다. (건방졌기 때문에 못보았을 확률이 크다)

 

그런데 어쩌다 '자유롭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은 '종교지도부'(지금 보니 이름 한번 괴상하다)에 들게 됐는지?  이상하게도 전혀 기억이 없다. 권유를 받고 자원했던가? 임명됐던가? 

종교지도부는 '학도호국단'과 더불어 '학생선도'(종교적으로)의 책임을 지고 싶어하는 모임으로, 교목실 뿐 아니라 학교의 지원을 톡톡이 받는... 정치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관변단체 비슷한 서클이었다. 아무튼 이 모임에 참가하여 뭔가 열심히 한 것 같긴 한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기숙사 내 기도실에서 가졌던 '다락방 모임' 정도... 그중에서도 둘씩 마주앉아 손을 맞잡고 상대방을 위해 소리내어 하던 '짝기도'.... 평소에는 수줍음 많고 목소리도 개미같은 선배 C는 기도만 하면 완전히 담대한 여장부로 바뀐다. 그 언니와 짝이 되어 기도를 하고 나면 얼마나 감사하고 후련하던지.... (非敎徒가 되어버린 지금도 그 뜨거운 충만감만은 가끔 그립다.)     

  

당시 내게 나름대로 신앙심이 있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종교지도부 활동을 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기독교의 범주를 넘어서는 사고에 대해 애써 눈을 돌리던 편협함이 거센 이념의 파도에 휩쓸려 무너져 내린 뒤에는... 내가 그토록 열렬히 신앙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허망하다. 그래서 아마 종교활동이 주를 이루었던 대학 초년 시절 기억은 그리 많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성가대 활동도 했군. 이 사진은 성가대 수련회 때 찍은 것 같다.

우리 때는 저런 폼이 '짱'이었다. ^^ 

저 무렵 채플 시작 전에 기타 메고 나와 전교생에게 복음성가 가르쳤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신앙심이 깊었던 학생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