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국내

남도기행5 : 보길도 가는 길

張萬玉 2006. 5. 19. 11:50

창문 덜컥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으니 비바람이 어지간히 드센 모양이다.

원래 부엉이였던 블뤼, 연 사흘을 새벽잠 없는 할매랑 움직이느라고 아침이 괴로웠을 텐데 오늘은 실컷 좀 자게 놔둬야지.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빠져나가 문을 여니 숨막힐 지경으로 비가 들이친다. 어디 비를 그을 데가 마땅찮으니 차를 끌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모래밭이 모두 빗물로 덮인 바다는 고운 베이지색과 옥색의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굵은 빗발은 차창을 거세게 두들기는데.. 음악 이빠이(죄송!) 틀어놓고 앉았으려니 캬! 천국이 따로 없네.

 

30분쯤 기분 내다 들어와 다시 따뜻한 잠자리로 미끄러져드는데 누가 문을 두들긴다. 어제는 못봤던 분인데... 주인아저씨란다. 전복죽을 끓였는데 식구들 먹고도 많이 남았다고 건너와서 맛좀 보란다. 어제 주인아주머니가 막 잡은 전복을 뭍에 있는 친정에 갖다주고 싶은데 비가 와서 못가겠다고 걱정하시더니만, 아마 그걸 잡으셨나보다. 이게 웬 떡!

블뤼와 함께 안채로 건너가니 인심좋은 넓적대접에 푸르스름한 죽(완도에서 먹은 죽은 내장이 안 들어간 하얀 죽이었는데 이건 제대로다)과 엊저녁에 우릴 까무라치게 했던 그 맛있는 김치가 차려져 있다. 한끼 정도는 뒀다 드셔도 될 텐데 이 귀한 걸..... 황송해하면서도 염치없이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우리를 보며 주인아주머니는 마치 자기가 맛나게 먹는 것처럼 흐뭇해 하신다.

 

이 아주머니의 미소는 진짜 (우리에게 맛난 걸 주셨대서가 아니라) 백만불짜리다. 원체 타고난 눈이 웃는 눈이라 늘 웃는 표정이지만 실제로 웃음을 터뜨리면 입도 함박만큼 벌어진다. (사진을 한장 찍어둬야 했는데... 아까비~) 처녀 때는 서울에서 무역회사에 다녔다는 이 아주머니, 당시 카투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저씨를 만나(그땐 다니엘 헤니를 완전히 빼다 박았었다고... ^^) 결혼하면서 아저씨의 고향인 청산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처음엔 김 양식으로 시작하여 김 가공공장, 민박, 낚시배 대여 등 점점 사업영역을 넓혀왔고 몇년 전부터는 전복양식도 시작했는데 수입은 괜찮지만 늘 일에 치여 힘들다고 하신다. 그래도 서울로 유학(!)보낸 맏아들 뒷바라지와 아직도 토깽이 같은 두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처럼 착실하게 자라가는 가업을 보며 힘을 얻는다는 아주머니... 말씀 내내 연신 함박웃음이다. (나도 많이 웃어서 나도 남도 즐겁게 해줘야겠다고 다짐. ㅎㅎ)

 

빗발은 약해져가고 바람은 거의 잦아들고 있다. 길 떠날 계획을 세울 때 블뤼는 (꽂히면) 청산도에 사흘 정도 박혀 있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막연하게 오래 집을 비울 수는 없는 나는 섬 한 바퀴 돌고 나갈 생각이었고.... 원래 하나가 짐을 꾸리면 남는 사람도 맘이 휑해지기 마련.... 청산도를 떠날 것이면 좀 서둘러서 오늘중으로 보길도에 떨어지자고 합의... 완도 가는 두 시 배를 타기로 한다.

 

아침도 느지막하게 먹었으니 점심을 보길도 들어가 먹기로 한다면 어제 주마간산으로 휙 돌며 점찍어놨던 view point를 한번 더 돌아보고 가도 될 것 같아, 하룻밤 정든 아주머니와 똘똘이녀석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다시 당리 쪽으로 간다. 가는 길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걷는 소녀를 태워줬는데 도락리에 있는 교회 목사님 따님이란다. '봄의 왈츠' 여주인공 은영이의 아역을 맡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예쁘고 똘망똘망하다. (여기서 나는 또 소설을 쓴다. 이 소녀를 사모하는 순박한 시골 소년이 아마도 몇 있을 것이고, 그 중 하나는 자기 마음을 들킬까봐 미운짓만 골라 하다가....ㅎㅎ 너무 구식인가?)

 

봄의 왈츠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비가 걷혀 말갛게 세수한 하늘이 고운 배경을 드리워주고 있다. 블뤼는 청보리밭에 꽂혀 아예 보리밭 속에 엎어져 있고 나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 벤치에 앉아 콧노래를 부른다. 청산도는 (바다도 좋지만) 이런 맛이다.

 

 

보길도 가는 배는 완도 화흥항에 있다(청산도 가는 배는 항만터미널에 있고).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이고 청산도에 비해 20분 먼 거리인 만큼 요금도 살짝 더 비싸다.(뱃삯은 운전자 포함하여 19000원, 개인은 얼마였더라? 7000원이었나 8000원이었나...) 

바닷바람은 보길도에서 나올 때 맞기로 하고 나는 블뤼에게 매달려 사진 강의를 청한다. 여객으로 꽉 들어찬 2층 선실과 달리 남정네 두 사람만이 큰댓자로 누워 코를 고는 3층 선실에서 '가방은 멀리 놓고 책은 가까이 놓고' 블뤼가 열강을 한다. (연습 안 해보면 다 잊어버릴 게 분명하지만... 암튼 이번 여행에서 참 여러 가지 건진다. 언젠가는.. 지금보단 나은 사진으로 선생님을 즐겁게 해줘야지. ^^ )

 

강의에 열중하느라 도착방송도 알아차리지 못할 뻔.... 허둥지둥 나오며 항구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니 확실히 청산도보다 더 스케일이 크고 수려하다. 이미 3시가 넘었으니 일단 민생고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선착장 아저씨들에게 베스트 레스토랑을 물었더니 '세연정'과 '보길도의 아침'을 추천해주신다. '세연정'이 먼저 시야에 잡혔기에 그 집으로 들어가 (자연산 회가 좋다는데 둘이 먹기엔 너무 과해서...) 심사숙고하다가 '간재미(가오리)회' 로 낙착.

 

 

풍경사진이 볼품없으니 맨 먹는 사진만 올리는군. ㅎㅎ 그래도 꽤 먹음직해보이지 않는가?

 

 점심을 먹고 나니 벌써 오후 네 시다. 보길도에서도 하루만 머물 예정이니 일몰은 오늘저녁뿐... 일단 오늘의 스케줄은 남서쪽으로 갔다가(선창리/보옥리) 동쪽 일출 보는 쪽(예송리)에 숙소를 정하는 것까지로 잡고, 내일은 섬 중앙에 있는 세연정 등 윤선도의 별장(!)터를 돌아보기로 한다.

 

청산도보다 훨씬 큰 섬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달려보니 그리 큰 섬은 아닌 듯... 해안도로를 끼고 그림 좋은 곳에 차를 세워가며 천천히 달렸는데 망끝전망대에 도착하니 일몰시간이 아직도 한 시간은 남았다. 어차피 보옥리에서 예송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없으니, 먼저 갯돌해안으로 유명한 보옥리부터 갔다가 일몰시간에 맞춰 전망대로 돌아온 다음 되집혀 청별항 거쳐 예송리로 가면 된다. 

 

 

보옥리 공룡알(갯돌) 해변.

골프공, 야구공, 축구공 만한 갯돌들이 파도에 부딪쳐 내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갯돌해안 끝까지 나가서 찍은 바다.

'겨울바다 나가봤지 / 잿빛 날개 해를 가린 / 갈길 잃은 물새 몇이 / 내 손등에 앉더군...'

 

ㅎㅎ 드뎌!

신흥리 일몰이었음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만들었던 동영상을 올릴 때가 되얏도다.  

 

    


 

그렇게 보길도의 밤은 저물어가고.... 밤길을 더듬어 예송리로 숙소를 찾아 갔던 우리는...

집은 마음에 드나 단체관광객이 북적이는 예송정을 피하고 나니 대조적으로 인적이 드문 민박집들은 너무나 썰렁하여... 청별항으로 되돌아갔다. 점심을 먹었던 세연정 옆 '보길도의 아침' 식당건물 2층에 여장을 풀고 내일 아침 다섯 시 기상을 기약하며 굳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