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말에 입주하는 아파트에서 우편물이 왔다.
베란다에 마련해준 화단에 흙을 채워줄까 말까 묻는 설문지다.
아하, 요즘은 모두들 베란다에 정원을 마련하는 모양이군.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같은 불량주부도 정원을 가꿔본 경험이 조금 있긴 하다. 89년이었던가?
직장 따라 잠시 세를 얻었던 집이 마당 딸린 집이었기 때문에, 오랫만에 밟아보는 흙에 감동한 나머지 꽃씨도 좀 뿌리고 상추도 심었다. 허나 원체 게으르기도 하지만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직장이다 보니, 씨뿌리고 나몰라라 하는 오입쟁이처럼 씨는 뿌렸으되 돌보는 건 하느님께 맡겨.... 우리 화단의 화초들은 늘 잡초들에게 머리끄댕이 잡힌 형상이었고, 게다가 일부 몸 약한 넘들이 말라죽어가며 불성실한 주인을 성토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거느린 식솔들을 버거워하는 무책임한 가장마냥 마음이 영 편칠 않았다. 내 주제에 무슨 정원 씩이나.... ㅜ.ㅜ
이렇게 화초 기르기 부적합자로 일차 판정이 났건만 주제파악을 못하고... 상하이로 이사올 때 마당이 있는 아파트 1층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다시 정원가꾸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심어만 놓고 잊어버리는 못된 버릇 개못주고 또 우북한 잡초밭만 키우고 말으니...
그나마 화분값이 아주아주 저렴한 동네에 살다 보니 한국 같으면 좀 부담이 되었을 고급화분들을 친구들이 놀러오면서 인사치레 과일마냥 들고 오는 바람에.... 행운목이니 산세베리아니 양란이니 한국에 오면 귀하신몸 대접 받는 녀석들이 하나둘씩 이 게으른 주인에게 입양되었고, 일단 내 품에 들어온 녀석들을 차마 말려죽일 수 없어 신경을 좀 쓰다 보니.... 화분 키우는 재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물 줄 때 안 놓치고 잎이라도 가끔 한번씩 닦아주면 그 눈꼽만한 관심에 보답하는 듯 알게 모르게 조금씩 키를 늘려가는 녀석들... 가끔은 꽃까지 피워 주인을 감동시키기도 하는 식물이라는 녀석들의 이런 은근한 재롱은 동물의 직접적인 재롱과 또 다른 맛이 있더군. 주인에게 요구하는 것도 기분 내킬 때 퍼부어대는 소나기 같은 애정공세가 아니라 오랜 시간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는 꾸준한 애정이니 어찌보면 동물보다 더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들이다. ^^
우좌지간 아파트 베란다에 정원을 키울까 말까 하는 과제를 앞에 놓고 궁리하면서 네티즌답게 '아파트 정원 가꾸기'라는 검색어를 쳐보니.... 에궁, 요즘 트렌드는 아마도 실내정원인갑네...
공기정화 식물들을 심고 잔디 깔고 가습기를 대체할 수 있는 작은 분수도 설치하고 물주기 좋은 장치까지 부착한... 인공미가 물씬 풍기는 그런 정원 말이다. 문제가 생기면 와서 관리까지 해준다네. 고급형으로는 벌레나 균의 번식을 막기 위한 인공토양(하이드로 볼)을 사용한 것도 있단다.
아, 이거 딱 게으름뱅이 내 타입이네...
그러고 보니 누구누구네 아파트 베란다가 떠오른다, 바로 그거였군.
그런데 요상한 건....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천편일률적인 사진을 질리도록 구경해서 그런가... 그노무 실내정원이란 게 웬지 좀 kitsch하게 느껴지는 거다. 원래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 맷돌이니 조각상이니 이것저것 얹어 더 '품위'있게 꾸몄다고 주장하는 고가품일수록....내 눈이 삐딱한 건가?
아니, 단순 소박하게 꾸민다 해도... '기본적으로 적지 않은 양의 흙을 집 안으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 정착민 문화를 낯설어하는 내겐 적지 않은 압박이다. 천방지축 아줌마도 이제 늙어가는 마당인데 본격적으로 화초기르기에 한번 올인 해봐?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흙은 필요없다" (치우기보다 사기가 더 쉬울 것 같아서.. ^^) 대답해놓고 며칠 뒤 서울 나가는 길에 아파트 공사현장에 한번 들러봤는데......
하하하... 이제서야 우리 집에 대한 확실한 감이 잡히더군.
그동안 상상했던 건 확실히 엉터리였다. 특히 거실 확장 후 화단 자리가 어찌되는지 알고 나니 나의 화단에 대한 구상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화단 쪽으로 접근하기가 저리 옹색해서야.....
뭐, 화단 앞에 티테이블 놓고 차를 마시겠다고? 꿈 깨셔!!
그냥 창 열고 물 주기 편한 그 자리에 작은 화분들이나 유치해서 키워볼까부다.
누가 만들어준 정원이 아무리 보기 좋다 해도, 작아서 볼품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성질을 이해하고 하나하나 자식처럼 키우는 맛이 더 낫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생각이 난다. 친구들 놀러올 때 새집이라고 세제.. 휴지... 그런 거 들고오지 말고 대신 어린 화분 하나씩 사오라고 하는 거야. 화분에 보내준 사람 이름 하나씩 붙여서 햇볕 좋고 물빠짐 좋은 그곳을 인큐베이터 삼아 정성으로 가꾸다가 덩치가 커지면 분갈이 하여 집안 곳곳으로 이주시키는 거야. 그 나무들과 함께 친구에 대한 마음도 함께 가꾸는 거지.
그리고 더 커져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이주시키는 거야.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의 일부를 그 아래 묻어달라고 하면 어떨까.
흠, 그거 맘에 든다.. 그럼 내 손자 손녀들이 와서 "이건 할머니 나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ㅎㅎ 진도 너무 많이 나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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