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경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다.
중국에서도 알고는 있었지만 자고 나면 집값이 뛰는 미친듯한 상황을 가까이 와서 보니 한국에 우리 집 한칸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마침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친구가 당시 재개발에 들어가기 시작한 난곡의 판자집을 4천만원에 사서 조합원이 되라고 했다.(물론 웃돈도 붙었지)
합법적인 매매행위였지만 하필이면 철거반대 투쟁의 격전지에 나 살겠다고 나선다는게 좀 켕겼지만 어쨌든 시장에 나온 매물이고 나는 집이 필요하고...
그렇게 나는 관악산 뜨란채의 권리자가 되었다.
사실 우리 나이에 (부양할 식구가 너무 많거나 빚이 크게 있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거나 투자를 한다고 설레발치다가 홀딱 들어먹거나 하는 일 없이) 꾸준히 직장생활을 했다면 대개 44평 이상의 집을 산다고들 하더라만, 나는 분양신청 할 때 주저없이 34평을 택했다. 세 식구 사는 데 그만하면 충분하고 무엇보다도 내 능력(청소를 말함. ^^)이 부담없이 관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면적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말들도 많았다. 왜 안 오르는 동네에 집을 샀냐, 신혼부부도 아니고 3,40대도 아니면서 어째 30평형대를 골랐냐 등등...(허나 우리는 남들 돈 벌 때 딴짓을 15년 가까이 했으니 소위 '3,40대에 어울리는 평수'에 사는 게 그 이상한 '기준'에도 딱 들어맞는 거 아닌가 말이지. ^^)
우좌지간 3년이 흘러....
마치 우리의 한국 이주와 아들넘의 복학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때맞춰 관악산 자락에 드높은 성채들이 우후죽순 솟아올랐고, 며칠 전 권리자협의회로부터 입주 전 사전점검을 하라는 통지가 왔다.
아무리 돈 잘 번다고 하더라도 요즘처럼 억.억.소리 나는 아파트 시세를 한방에 따라잡기가 어디 쉬운일인가. 소도 뒷발질하다가 쥐 잡는다고... 재테크의 재짜도 모르는 나로서 이 정도의 노력으로 집 한 칸 마련한 건 비교적 대박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
이렇게 므흣한 마음으로 하자점검을 나섰으니 무슨 하자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달동네에 조성된 단지이고 주택공사에서 지은 아파트이기 때문에(아무리 브랜드 네이밍으로 이미지 제고를 한다지만) 요즘 짓는 아파트들의 고급스런 분위기는 처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분양가 싸고 실평수 넓게 나오고 튼튼하게 짓고... 그러면 됐지, 그 정도였는데.
허나 생각했던 것보다 풜씬 괜찮더군.
예상보다 넓고.... 자재도 쓸만하고...쉽게 만족하는 건 나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
긍정적인 자세로 문짝 비뚤어진 거 있나 물은 잘 빠지나 전기는 잘 들어오나 열심히 체크...
딱 하나 불만이라면 싱크대 상판 색깔이 요상한 분홍색이라 이름만 인조대리석이지 꼭 싸구려 플라스틱처럼 보이는 것뿐.... (입주 전에 조것만 갈아야겠군)
그런데.
점검을 마치고 나오는데 곳곳에 '구경하는 집'이라는 현수막이 펄펄 날리길래 한번 들어가 봤더니...
앗! 인테리어를 새로 한 집과 안한 집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중국에 있을 때 시누이가 일괄적으로 신청할 때 하라고 연락을 해주길래 그래야 하는 건가보다 하고 베란다 확장과 샷시교환 공사를 신청해뒀기 때문에, 새집에 무슨 공사가 더 필요한 걸까 궁금했는데...
바로 이래서 멀쩡한 벽지 뜯어내고 문 내어달고 들여달고 야단이로구나.
그래서 포장이사가 다 해주는 세상인데도 '이사 준비하려면 바쁘겠다'고 인사들을 하는구나...
첫집엘 갔더니 이게 가정집이냐 레스토랑이냐.
전실을 확장하고 벽에 대형 장식타일을 붙이고 거실 전면과 반대편쪽 벽을 대리석과 이미지 벽지로 화려하게 장식을 했다. 빛나는 샹들리에와 곳곳에 달린 매달린 콘솔, 가족사진을 인쇄한 대형 타일벽 등 상당히 대담한 인테리어인데 확장을 해놓으니 34평형 아담한 사이즈에도 그런대로 어울린다.
아니, 이렇게 하면 돈 얼마 들어요?
확장공사와 샷시공사 빼고 천오백 정도 든단다.
얼이 빠져 그 다음집으로 갔더니 마침 그집이 내가 확장공사를 맡긴 집과 제휴한 인테리어 회사가 꾸민 집이란다. 여기는 강남의 잘나가는 치과 분위기... ^^ 편안하고 고급스럽다.
일단 대문을 들어서면 딱 눈에 들어오는 수납장 문이 고급스럽다. 브랜드가구 H사의 솜씨인데 내부는 원래 주공에서 제공한 것을 그대로 두고 문짝만 바꿨는데 80만원이란다. 그리고 뽕뽕 뚫린 연한 오크색 합판으로 벽을 감싸고 수도계량기 있는 곳은 같은 소재로 야트막한 화분을 짜서 보스턴 고사리를 심어 싱싱한 느낌을 주었다. 오메! 이건 딱 내 취향이여~
120만원 한다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역시 현관 밖 수납장과 같은 소재의 신발장이
돈을 바른 듯 안바른듯 단아한 모습으로 확장공사를 함으로써 길어진 복도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는 친환경적인 인테리어를 지향한다는 캐치프레이즈에 어울리게 편안하고 품위있는 공간이 여유있게 펼쳐진다.
인테리어의 절반은 가구라고 했던가? 매장에서는 한푼도 안깎아준다는 고급브랜드 가구를 인테리어와 함께 주문을 하면 몇 % 싸게 준다는 유혹과 함께 곳곳에서 깔끔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시스템 부엌으로까지 안 바꿔도 기존의 후드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후드 역할까지 해낸다는 무빙 전기오븐을 설치해준다는데 110만원이란다. 밝은 불빛 아래 닭다리를 싣고 스위치 하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오븐을 바라보니 정신이 다 아득해진다. ^^
붙박이장과 붙박이책장, 시스템부엌 빼고 요대로 다 하면 얼마예요? 하니까 0000만원이라고 한다.
헬렐레~ 해가지고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왔다는 디자이너 선생님을 면담한다.
선생님, 다 맘에 드는데요... 벽을 다 나무로 감싸니까 좀 질리네요.
일부만 나무 씌우고 고급 벽지로 대체하면 좀 안 되겠니~?
"이미지가 안 나오는데요... 그럼 몰딩이 안 맞아서 선이 안 살아요."
선생님, 좋긴 한데요, 합계금액이 너무 쎄네요. 뭘 좀 빼면 안 되겠니~?
"그럼 이미지가 안 나오는데요...쓰시는 김에 조금 더 쓰시죠. 한번 하면 오래 가잖아요."
선생님, 우리는 알러지 같은 거 없고 신체건강한데. 이렇게 비싼 친환경 자재 안 쓰면 안 되겠니?
"일단 써보세요. 저희는 환경측정장비 가져와서 다 측정해드리는데 기계만 얼마짜리랍니다."
흐유...
안 보느니만 못하군. 이제 그만 하시지?
그 집구경을 하고 나와 다시 우리집으로 들어가보니 식어빠진 찬밥 같고 풀기 빠진 모시옷 같다.
정장 상의에 분홍 면바지 입은 것 같은 요상한 분홍색 싱크대 상판만 바꾸고 살아야지 했는데....
멀쩡한 인테리어 다 뜯어낸다고 흉보던 만옥이는 어디 갔지?
뭐야, 이게.... 네 시가 넘도록 점심도 못 먹고!
구경 다니는 사람들들도 다 뭐에 홀린 사람들 같다. 이렇게 안 하면 꼭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랄까.
대부분 인테리어를 새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면 전세도 잘 안 나간다니...
이런 게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새로 생긴, 내가 적응해나가야 하는 한국의 '상식'인 걸까?
일단 철수하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에 전혀 연고가 없는 거리를 지나는 중인데 가구 전시품 세일한다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브랜드가구점이다. 홧김에 계집질이라고.... 차를 멈추고 들어가니 내가 사려고 했던 아이템들이 바로바로 눈에 들어온다. (중국에서 쓰던 가구들을 집과 함께 렌트해놓고 왔기 때문에 입주 때 다시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붙박이장, 침대, 식탁, 책장세트.... 평소에 한 아이템만 사려고 해도 보고 또보고 재고 또재고 했을 텐데 한눈에 다 마음에 든다. 가격도 예산 잡았던 것보다 40% 가량 저렴하고... 전시품이라 예약금을 걸지 않으면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지갑을 열 뻔하다 꾹 참고...
일단 철수하기로 한다. 이제 집에 가서 복습을 해야지.
왼종일 이리저리 끄들려다니며 이 장단 저 장단에 춤을 췄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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