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젊음의 노트를 다시 꺼내 보니

張萬玉 2006. 9. 11. 10:58

이사를 하고 제일 먼저 떠올렸던 얼굴은 여기서 산 하나 넘는 동네에 살고 있는 K네 가족, 그리고 이십년이 넘도록 여전히 헤어지지 못해 한동네에 모여 사는 그녀의(그리고 우리의) 血盟(!)들이었다. 

 

아직은 쓰지 못하고 있는 내 80년대 비망록 첫머리에 등장하는 그네들....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10대 후반의 근로청소년들이었던 그네들도 이제 당시의 자기 나이 또래 아들딸을 거느린 부모가 되어 인생의 중턱을 힘겹게 넘고 있을 터...

모두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조우했던 K로 인해 우리의 근황이 알려지자 이 동네로 이사 오면 자리 한번 마련하자고 모두들 야단이었단다.

 

사실 부담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식이고 가진것이고 모두 내어놓고 유무상통하며 뜻을 함께하던 시절에도 學出이니 勞出이니 하는 껄끄러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건 함께 어깨걸고 피터지게 싸우면서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울타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제자리로 돌아가면 기득권에 합류할 수 있을 꺼라는 신분상의 약점(!) 때문에 학출들은 늘 마음 한켠에 주눅이 들어 있었고, 이십년이 지난 오늘 그네들을 만나려는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것도 일종의 그런 감정이랄까. 게다가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지금은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과거의 인연 외에 우리에게 어떤 얘기들이 더 남아 있을지(게다가 나이 차이까지 있으니)....

 

처음엔 간단했던 것이 생각을 할수록 복잡해진다. 일단 K에게 전화를 돌려 우리 이사왔다고  신고전화를 하니 반색을 하며 대뜸 하는 소리가, "아이고, 언니 잘됐다. 이따 저녁에 대우 모임 있는데 끝나고 다같이 그리로 술마시러 가믄 되것네!"  

변함없이 화끈하군. 에라, 모르겄어.ㅎㅎ

 

나도 2공장에서 근무하긴 했지만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 뽑혀나갔기 때문에

http://blog.daum.net/corrymagic/6975745

엄밀히 말하면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원도 해고자도 아니고 해고자 부인일 뿐이다. 그러나 남편과 몇몇 간부들이 징역을 살 동안 뒤에 남은 해고자들과 같이 굶고 같이 싸우고 같이 끌려다니다 보니 오히려 내가 당사자인 남편보다도 이 친구들과 더 가까웠다. 오랜만의 전화 한 통이 동고동락하던 그시절을 뜨끈하게 일깨워주다니... 아직 내가 그렇게까지 메마르진 않은 모양이다.

 

졸지에 만들어진 자리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중국요리 큰넘으로 대여섯 개 시키지 뭐. 소주 한 박스, 맥주 한 박스, 과일 한 박스 풀고 남편에게 전화하여 일당의 습격소식을 알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낯간지러운 집안장식에 한소리 듣지 않을까 하는 나의 공연한 소심함이 채 머리를 들기도 전에 한꺼번에 쳐들어오는 어지러운 발소리, 반가운 비명소리... 희끗희끗 흰머리도 눈에 띄고 중부지방도 제법 두툼해지긴 했지만 무청 같은 싱싱함은 여전하다.

 

통닭집에서 시작하여 꽤 큰 호프집으로, 지금은 바다이야기로 벤츠를 굴리고 있다는 M, 축산물 도매로 제법 돈을 벌었지만 암과 투병중이라는 Y 얘기로부터 시작하여 인도네시아 공장 근로자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십수년 살다가 딸네미 대학입시를 위해 들어왔다는 K, 개량한복 공장을 시작하여 어렵지만 십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S(이 친구 결혼할 때 남편이 주례를 섰다), 작은 택배회사의 사장이자 배달원인 S와 미싱사 K는 아직까지도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닭살커플.... 샘플제작 전문 회사를 차려 이제 제법 프로패셔널한 여사장의 풍모를 물씬 풍기는 J, 인천에서 주물공장을 하여 성공했다는 P와 H커플, 딸만 여섯을 낳았다는 C.... 살아가는 얘기가 끝이 없다. 그시절에 산업체 고등학교나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파업에 참가하면서 졸업하지 못했던 친구들 중 몇몇은 사십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야간대학 혹은 방송대학으로 배움에 대한 열의를 이어가고 있단다. 대단한 친구들이다.

 

재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여전히 별볼일 없는 서민들의 고만고만한 삶일지 모르지만, 출세에 목매달고 끊임없는 탐욕에 목마른 그들보다 훨씬 여유있게 살아가는 이 친구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한 동네에 살면서 어려운 일 서로 돕고 즐거운 일 서로 나누며 당시의 의리와 우정을 이어가는 친구들이 있으니.... 

당시의 얘기가 나오자 이구동성으로, 얻어맞고 쫓겨나고 취업에 어려움을 겪게 했던 그 일을 후회해본 적이 결코 없다고 한다. 사회를 보는 시야도 넓어졌지만 정당한 일을 한다는 데 대한 자부심, 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견뎌내겠다는 오기가 이후의 삶을 일궈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줬다는 얘기다. 

  

준비한 술이 바닥을 보일 무렵부터 잔치판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작년에 치러졌던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행사 준비를 계기로 시작된 친목모임 얘기인 모양인데 별로 큰 사안 같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얼마나 열띤 토론을 벌이는지, 밖에서 들으면 무슨 큰 싸움이 난 줄 알았을 꺼다. 입주세대가 적어 아파트가 텅 비었으니 다행이었지.. 경찰 올 뻔 했다. ㅎㅎ

여전하구나, 늬들은 요즘도 그렇게 빡세게 노냐? 난 기운 딸려서 이제 도저히 같이 못 놀겄다. ^^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대로 헤어질 순 없다는 거지.

술이 꼭지까지 오른 남편은 이미 붙들려 나갔고, 암만해도 끌려갈 것 같아 상 치운다는 핑게로 부엌 구석에 숨은 나까지도 꼼짝없이 붙들렸다. 벌써 새벽 한 시인데...

쓰레빠 바람으로 끌려나간 곳은 난곡 버스 종점에 있는 노래방. 이미 불은 붙었고 점잔 빼는 멘트는 음주가무 속에 파묻혀버린다. 좋든 싫든 이런 상황에선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쑥스러움의 끈을 놓아버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근데 도대체 어디서들 이런 에너지가 나오는 거야.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가까스로 일행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남편이 취기 어린 한 마디를 던진다.

"참 고맙구나."

"뭐가?"

"잘들 살아줘서..."

남편 역시도 그네들에 대한 일말의 부채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