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일 날이 꾸무레하더니 평소보다 일찌감치 날이 어두웠다.
날씨를 타는지 내 기분도 꾸무레하여 종일 침상에 묻혀 있었다.
읽다 자다 읽다 자다.... 정신이 번쩍 들어 보니 어느 새 저녁 일곱 시가 넘었다. 이런이런....
얼른 세수하고(여태 세수도 안 했다. 세상에...) 김치 돼지고기 숭숭 썰어 개스에 앉혀놓고
청소해야지... 창문을 여니 매운 칼바람이 성난 황소처럼 쳐들어온다.
추위가 갑자기 닥칠 때마다 떠오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맞았던 첫추위.
동복이라는 이름이 붙은 겨울용 교복이 있지만 그 외로 오바(코트)도 교복처럼 똑같이 맞춰입는데
교복 맞출 돈도 없어 애를 태웠던 나는 그해 겨울에 오바 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좀 떨면서 다녔겠지만 안 추운 척 용감한 척 버티며 그 겨울의 한가운데까지 왔는데.....
그 어느날 저녁인가 일기예보에서 내일 아침은 영하 십몇도로 떨어질 거라고 한다.
가여운 엄마, 걱정이 늘어졌다.
"어떡하니, 저렇게 춥다는데..... 얘, 언니 안 입는 저 빨간 오바 입고 가면 안 되니?"
다른 학교들이 지정한 오바는 곤색 내지 검은색이었지만 교복 스타일도 별나고 머리모양도 비교적 자유로웠던 우리학교에서 지정한 오바색깔은 특이하게도 붉은 자주색과 밤색이었다. 게다가 색깔만 비슷하면 디자인에 대해서는 크게 단속하지 않았으니 빨간색을 자주색이라고 우기면 안 될 것도 없지만...
빨간색도 빨간색 나름이지, 이건 완전 불타는 밝은 빨강색이었고
직물도 양털처럼 보글보글한 원단인데
결정적으로는 발목까지 오는 롱코트였다.
안돼, 안돼, 안돼!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안 돼!!
불꽃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코트에 파묻혀 등교하고 있는 끔찍한 상상에 도리질 치며 날밤을 새웠는데...
긴긴 고민의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은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숨을 쉬면 콧속이 쩍쩍 달라붙는 강추위 때문에 그랬을까?
내가 헐벗고 가면 분명히 눈물 찍어낼 엄마 때문에 그랬을까?
아무튼 나는 그 거대한 코트를 입고 아무렇지도 않게 등교를 했다.
그때 아이들의 수근거렸는지, 내가 몹시 창피했는지, 생활지도부 선생님의 지적을 받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일 없이 지나간 게 분명하다. 짐작컨대 등교 상황 자체는 내게 별 상처를 남기지 않았나보다. 다만 그 코트 입고 갈 것이 끔찍했던 전날 밤의 고민 만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신기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모양새에 대해선 한없이 인심좋은 나지만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코트...
그 끔찍한 코트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도 아마 누가 입던 걸 얻어온 걸텐데....
갑자기 그 코트가 보고 싶어 콧등이 시큰해진다.
2.
상념을 뚫고 찬바람과 함께 남편 목소리가 현관으로 들어온다.
"눈 온다, 첫눈이야!"
바깥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에이, 무슨 눈? 비잖아."
올해는 첫눈이 진눈깨비로 내렸다. 천둥번개까지 데리고 왔다. 이 무슨 징조?
TV에서는 '올해의 10대뉴스'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남을 만한 사건들을 연속 보도하고 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연.속. 보도하고 있다.
첫눈 오는 날 날벼락이 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 가고....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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