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국가들 중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앞의 두 나라는 여행계획에 없으니 상관없고, 볼리비아는 비자를 받아야 한다.
과거에 외교관도 있었고 무비자협정국이었다는데 왜 외교관계가 청산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꼭 가봐야 할 코스로 꼽히고 있는 우유니 때문에 여행자들 까페에 가보면 '볼리비아 비자받기 노하우'에 대한 글이 자주 눈에 띈다. 특이한 건 다른 나라 비자와 달리 볼리비아 비자는 우리나라에서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리마에서, 쿠스코에서, 푸노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산티아고에서 등등...
왜 그런가 궁금해서 주한 볼리비아영사관을 검색해봤더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일단 주한볼리비아 명예영사관이 멀리 있고(의정부), 입국신청서, 호적등본, 인감증명 등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스페인어로 번역해서 공증해야 하며(번역료 공증료 추가요~) 발급 받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고, 왕복 항공권까지 있어야 한다(나같은 육로입경자는 낼 방법이 없겠군). 심심한데 남달리 한국에서 볼리비아 비자 한번 받아볼까나 했던 실없는 꿈은 접어야 했다.
어디서 비자를 받든 볼리비아에 입국허가를 받으려면 노란딱지(황열병 접종증명 카드)가 있어야 하기에 어제 국립의료원에 갔다. (황열병 접종은 월요일과 목요일에만 하며 미리 예약을 해둬야 한다)
우선 안내데스크에서 내주는 두 장의 예방접종 신청서류를 작성하고 5번창구에 가서 접수를 한 뒤(21,000원) 해외여행 예방접종 진료실로 들어갔다. 사실 황열병 예방주사 접종 외에도 내겐 이 진료실에 다른 볼일이 있었다. 홍역, 풍진, 독감, 소아마비, 수두 예방접종 영문증명서도 뗄 생각이었다.
볼리비아의 출입국 관리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오불까페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어느 도시에서 비자를 받느냐에 따라 비자 받는 난이도가 들쭉날쭉한 것 같았다. 어디는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과 30달러만 있으면 된다고도 하고 어디는 심지어 황열병 접종을 안 받아도 방법이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볼리비아는 비자를 내줄 때 홍역, 풍진, 독감, 소아마비, 수두 예방접종에 대한 증명까지 요구한다. 그래서 빡세게 걸린 경우엔 현지 보건소나 병원에 가서 어릴 때 이미 맞은 홍역접종까지 다시 맞기도 했단다. 현지에서 우왕좌왕하느니 아예 영문증명서까지 깔끔하게 만들어가야지.
황열병 예방접종 진료실로 들어가 그 접종에 필요한 조건을 문진하는 의사선생님께 그런 사정을 얘기하니 의사 선생님 말씀, 58년생이시면 이런저런 예방주사를 안 맞으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한다.
"아니, 선생님.. 제가 어려서 기억은 안 나지만 혹시 안 맞았다 하더라도 제 나이가 오십인데 여태껏 홍역 소아마비 안 걸렸으면 안전하다고 봐야지 이 나이에 그 예방주사를 다시 맞으라꼬요?"
"에. 그럼.... 어린애들 주로 걸리는 홍역, 풍진, 소아마비 예방주사는 맞은 걸로 해드릴 테니까 독감, 수두 주사는 맞으세요."(에구... 나는 황열병 접종 외에 다른 접종 할 생각은 없이 왔는데....)
"수두랑 독감은 안 맞고 싶은데요..."
어쨌든 선생님이 작성한 영문 예방접종증명서가 프린터에서 빠져나오자 간호사가 안내를 하는데...
"요기 접수창구에 기다려서 접수하시구요..."
"무슨 접수를 또 해요? 황열병 접종값은 냈는데요.."
"독감이랑 수두 맞으셔야죠."
"네? (황급히 영문증명서를 보니 독감과 수두까지 접종한 걸로 되어 있다) 저 독감이랑 수두 안 맞을 껀데.... 선생님이 체크해버리셨네요. 안 맞는다고 말씀 드린 것 같은데...."
"아유, 그거 있어야 비자 나오니까... 아무튼 이 수납 줄 기다려서 접수하시고.... 아니, 수납 줄이 기니까 그 사이에 입퇴원 수납하는 창구로 가셔서 이 영문증명서에 확인도장부터 받으시고... 그리고 수납하신 다음에 주사실로 가셔서 주사 맞으세요."
아유, 무슨 절차가 이리 복잡한고? 얼떨떨한 채로 수납창구 앞에 앉아 잠깐 정리를 해본다.
수두랑 독감은 안 맞을 테야. 돈도 들지만(독감 2만원, 수두 4만5천원) 씰데없이 왜 균을 미리 몸에 넣나?
그럼 어떡하지? 증명서 다시 떼어달라고 해?(구질구질하군)
아니다, 잠깐! 내게 필요한 건 황열병 주사고 이 비용은 이미 치렀으니 그냥 주사실로 가서 황열병 주사만 맞으면 끝나는 거잖아. 아니, 간호사 말마따나 확인도장부터 먼저 받고 나면....(다른 주사 안 맞아도 완벽하잖아?)
일단 입퇴원 창구로 가서 만원 내고 영문 예방접종증명서에 도장 꽝!
이제 남은 것은 국립의료원이 발행한 예방접종증명서를 사기로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인데...
에혀~ 날 믿고 주사 맞기 전에 증명을 해준 건데 그러면 쓰나...
소심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정직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장 받아가지고 수납창구 앞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사이에 번개같이 결정해버렸다. 맞자! 원칙대로 하자.
어른이 원칙 안 지키면 누가 지키나.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젊은여행자들의 편법을 나 같은 어른이 교과서로 삼고 있다니.... 어느새 나도 편법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나보다.
결정했으니 이젠 내가 그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 이유나 찾아봐야지. 본전 생각 안 나게.
몸 약한 사람들은 한국에 있어도 독감 예방주사 맞잖아. 날씨도 변덕스럽고 추운 우유니 사막도 건널 것이고 여독이 쌓이다 보면 면역력도 떨어질 꺼고.... 독감주사, 맞아주지 뭐. 수두도 내가 어릴 적에 정말 앓았는지 어땠는지 모르잖아. 수두는 어른도 대상포진 형태로 앓는다고 하던데... 맞아두지 뭐.
주사실에 들어가 왼팔에는 황열병과 독감 백신을, 오른팔에는 수두백신을 맞았다.
지금 내 몸에서는 세 가지 전염병균들이 백혈구와 전쟁을 벌이고 있나본데 무쇠같은 내 몸은
예방접종 때문에 금지된 수영수업만을 그리워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편법이 원칙의 정당성에 도전을 하고 있다면 뭔가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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