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이 부실하니 김치찌개(급경사 없는 흙산)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돼지고기 대신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도 좀 먹어보자고 이번 일요일은 광교산으로 향했다.
지난번 수원 팔달산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아주머니로부터 추천받은 광교산.... 내가 그 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경사가 완만하여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흙산이라는 것, 화장실이 훌륭하며 그 이름이 '반딧불이'라는 것, 그 산을 영동고속도로가 광교터널로 관통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기에 큰 기대 없이 갔다. 길도 몰라 네비게이션에 '광교저수지'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경수산업도로를 24킬로미터 달려 장안지하차도 건너서 좌회전하니 바로 광교산 들어가는 길.... 2킬로 정도 더 가니 오른쪽에 경기대학교, 왼쪽에 공영주차장을 낀 광교저수지가 나타난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다를 것 같아 어디를 들머리로 잡아야 차를 가지러 가는 수고를 덜 수 있느냐는 의논이 출발 전에 있었지만 막상 와보니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우리가 내려오는 길로 잡았던 삼광교 종점까지는 차량을 통제한다.
일단 '아름다운 화장실'로 알려진 반딧불이 화장실 구경을 하고(사람이 많아서 그리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을 따라 살짝 가파른 짧은 경사를 올라가니 벌써 능선이다. 말이 능선이지 낮은 능선 양쪽 사면에 헐벗은 나무가 빼곡이 앞을 가려 시원한 전망도 없다. 게다가 사람은 많지, 메마른 산에 사람들 발길이 만들어내는 먼지가 자욱하고 날도 흐려 영 기분이 안 난다. 오늘도 변함없이 삼막사 가자는 남편 억지로 꼬드겨서 왔는데.....
"거봐, 우리 뒷산이 최고랬잖아."
"그래도 여기저기 다녀봐야 진심에서 우러나는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거야."
실망을 무마하기 위해 '저쪽이 백운산 방향인가?' '저 넘어가 청계산 쪽인가?' '체력 좋은 사람들은 청계산부터 시작해서 광교산 거쳐 백운산까지 간대. 아홉시간 걸린다나?' 해가며 짐짓 관심을 과장해보지만 단순한 코스에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유원지에 왔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등산의 주목적, 체력단련이나 착실하게 하고 가야지.
마음 고쳐먹고 꾸준히 걷다 보니 코스가 점점 맘에 들기 시작한다. 완만한 길을 걷다 보면 살짝 가파른 경사, 땀이 송송 솟을 만하면 다시 완만한 길로 달래주고 조금 쉬었겠다 싶으면 조금 더 가파른 경사...
보기만큼 만만하지는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잘 설계된 운동프로그램 같다고 할까? 거의 다 올라왔겠다 싶은 시점에서 고개를 들어 보면 아직 부족한 2%의 땀을 더 쏟으라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급경사의 종점이 손짓을 한다. 나더러 광교산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자상한 트레이너'라고 하겠다.
형제봉 아래까지 가니 제법 기분좋게 땀이 흐르고 인파도 줄었다. 전망도 트이기 시작하니 진짜 등산은 여기부터일 듯한데 내 다리는 피로를 알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한 시간 반 가까이 걸었나? 정말 오는 줄도 모르게 왔다. 가져온 찰떡과 커피로 요기를 하며 땀을 식히고...
형제봉을 돌아가니 예상밖의 급경사(흠, 이런 코스도 가지고 있었군).... 양지재를 넘어 종루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우리 뒷산의 호압사에서 전망대 올라가는 코스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다(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던 그대여, 이제 진정 변치 않는 충성을 바치리다. ㅎㅎㅎ)
종루봉을 지나 광교산에서 가장 높은 시루봉으로 가는 이정표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계속 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가지재까지는 아직도 10킬로 가량 남았는데 내게 그 코스는 무리고,
시루봉을 지나쳐 하산하는 코스는 안식년 제한에 걸려 폐쇄되어 있으니 시루봉 못미쳐 토끼재에서 하산할 것인지, 시루봉까지 갔다가 토끼재로 돌아올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눈앞에 이 산에서 가장 가파를 듯한 경사면을 두고 자상한 트레이너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오늘의 훈련은 족하니 그만 하산하거라...^^
토끼재에서 내려가는 길은 난지도 하늘공원의 계단 만큼이나 장관이다(더 긴가? 세어볼 걸 그랬다).
그나마 내려가니 다행이지 이곳을 들머리로 잡고 올라왔다면 아마 질려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계단이 끝나고 조금 더 내려가니 수원시가 공들여 가꿔놓은 길이 나온다. 아름다운 계곡, 지압길, 그리고 광교저수지.... 수원 사람들 참 좋겠다..^^
내려오고 나니 살짝 아쉬워진다. 면적도 넓고 활엽수도 무성하니 숲이 무성해지는 계절에, 혹은 눈이 무겁게 덮였을 때('광교산 적설'이 수원8경의 하나란다) 다시 한번 와봐야지. 다음엔 북수원 IC쪽에서 가지재로 올라와 토끼재로 내려와볼까? 용인 사는 언니랑은 앞으로 여기서 만나자고 해야겠다.
11시 15분에 오르기 시작하여 휴식시간 20분 포함, 2시 10분에 내려왔으니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토끼재로 내려오면 상광교동 버스 종점이다. 차를 경기대 쪽에 주차해두었으면 이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게 좋겠다. 예닐곱 정거장 정도 되는 짧지 않은 찻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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