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을 달려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었으나 우유니에서 질리게 보았던 사막풍경은 계속된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낯선 절경에 놀라 깼다. 얼마나 잤나 어느새 버스는 험산준령을 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인가 보다.
구절양장의 아찔한 내리막길... 넓은 계곡.. 벌써 다섯 시간째 인가 없는 산과 계곡을 누비고 있다.
후후이 지역에 들어서니 조그만 산간마을이 나타난다. 산 색깔도 동네 분위기도 기묘하다. 만일 볼리비아를 거쳐오지 않았더라면 살타에 하루쯤 더 머무르면서 살타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이 마을에 놀러왔을 꺼다. '구름기차 투어' 등 살타의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투어 중엔 분명히 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을 듯.
버스로 지나치면서 본 후후이 시내는 중국의 소도시를 연상케 한다. 적당히 후지고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인심좋은 인디오들의 마을...
살타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아르헨티나 돈이 하나도 없는데 터미널의 ATM 기계가 내 카드를 거부한다. 호스텔에 가면 환전을 할 수 있겠지만 호스텔까지는 어떻게 이동한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십대(?) 소년들이 ATM 앞에서 쩔쩔매는 나를 보고는 자기네 택시 에 낑겨줄 테니 같이 가잔다. 하지만 걔네 일행이 이미 네 명이다. 일곱명까지 한 차에 타본 적 있다고 큰소리 치는 아그들의 재롱을 뒤로 하고 나는 론리가 소개하는,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호수변을 끼고 20분만 걸으면 된다길래 야간산책 나온 동네사람인 양 느긋하게 걸을 요량이었지만 낯선 도시의 밤이 주는 긴장감 때문인지 걸음걸이는 어느새 파워워킹으로 변해버린다. 가로등은 어둡고 호수변 노점들도 하나둘씩 포장을 걷고 있다.
이 동네에는 back packer's....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호스텔이 세 군데 있다.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도착한 Terra Oculta에 방이 없다. (분위기는 좋아 보인다. 32페소)
다른 곳을 소개시켜달랬더니 한 블럭 아래에 있는 Pailar를 소개해주는데 역시 방이 없다. 다시 소개를 받아 찾아간 곳이 Back Packer's Home.
텅 빈 6인실 방으로 데려다주는데 침대 난간 하나에 덩그라니 걸린 양말과 속옷을 보니 암만해도 오늘밤엔 낯선 남자와 단둘이 방을 쓰겠구나. 호주머니에 돈이 있고 세 시간만 일렀어도 다른 숙소를 찾아볼 텐데 지금은 밤 11시.....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라, 절도라면 혹시 몰라도 강도나 강간행각을 벌이면서 여행하는 배낭족 얘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 층에만 해도 6인실이 두 개나 더 있다, 내겐 호루라기도 있다... 무서울 게 뭐람.
대강 씻고 막 잠에 떨어지려는 순간 누군가 들어온다. 자는 척하려는데 굳이 인사를 건네는 이스라엘 총각... 흑인이다. 잘 자라고, 자기는 지금부터 놀러나간다네? 클럽 가냐 했더니 카지노(!!)란다.
그러고 나간 애가 내가 잠 깰 무렵에 들어와 샤워하는 기척을 내더니 그때부터 자기 시작한다. 이게 호스텔의 불편한 점이다. 이렇게 되면 부스럭 소리도 신경이 쓰여 오전 내내 방 안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카메라와 지갑만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다. 아침 먹고 이과수 가는 표 알아보고 시내구경이나 하다가 체크아웃 시간에 돌아와서 방을 옮기든지 호스텔을 옮기든지 해야지.
호스텔 나서자마자 멋진 콜로니얼 건물과 성당들의 인사를 받고
사막 아니면 산간지역 아니면 빈민가에 익숙해졌던 내 눈이 깜딱 놀란다.
정말 아르헨티나스러운 동네 골목
Cumplean~os Feliz!!
신새벽부터 생일축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지나가는 녀석들. 밤샘파티라도 한 모양이다.
육류가 풍성한 나라에 온 실감이 난다. 길거리에서 구워 파는 고기조차도 상등육이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보행가와 센트로 광장이 있다. 아직은 이른 아침...
아르헨티나를 두고 누군가 '짝퉁 유럽'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볼리비아, 혹은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들어가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은 동네인데 특별히 '관광객'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이 그동안 돌아다닌 나라들과는 다른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거거리의 빵장사 아저씨에게서 바게트 하나 사보려다가 너무 커서 포기.
父子有親..
터미널 옆의 공원. 축구의 나라답게 곳곳에서 축구하는 청소년들을 볼 수 있다.
'살타 왔던 기념으로 나 찍어가. 나 잘 생겼지?'
웃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니다 보니 아르헨티나엔 실없이 수작 거는 남자들이 많더군.
이과수 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보러 갔던 길에 그냥 티켓을 사버렸다.
살타에 하루 정도 더 있어볼까, 25시간이라는 장거리가 부담스러워서 꼬리엔테스나 레시스텐지아 정도에서 내려 하룻밤 묵어갈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여행이 자꾸 늘어지는 기분이 들길래.
갈 길을 서두르는 건 이제 권태기에 들었다는 뜻일까. 살타는 조용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딱 잡히는 컨셉도 콱 꽂히는 느낌도 없으니 하룻밤 잔 것으로 패스해도 그리 섭섭지는 않다.
'간단히' 먹으러 들어간 '그저그런' 식당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쇠고기'. 5달러가 조금 안 되는 가격이다.
신선한 목초를 먹고 자라서 그런가 누린내도 없고 얼마나 연한지 씹을 새도 없이 살살 녹는다. 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지라 몇 점이면 끝인 나도 두툼한 한 덩어리를 후딱 해치웠다.
샐러드도 간단하기 짝이 없다. 두 가지 정도 생야채에 식탁에 놓인 올리브유와 식초를 적당히 치면 끝.
이제 25시간의 장거리 버스여행 시작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온 다음부터는 가도 가도 끝없는 팜파스.
무료함을 달래려고 차창 밖을 향해 계속 셔터를 눌러대보지만 사진이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은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사이에도 버스는 쉬임없이 달려가고....
옆 자리에 찬바람 쌩 도는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앉았다가 자정쯤 코리엔테스에서 내렸다.
밤은 왜 그리도 긴지... 에어컨은 왜 그렇게 빵빵한지... 너무 추워서 꺼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여전히 춥다. 자동시스템인지 간헐적으로 윙~ 돌아가는 소리가 예민해진 신경을 밤새 괴롭힌다.
그래도 좌석만은 최고다. 뒤로 쭉 제끼면 거의 취침모드가 가능할 정도.
다시 동이 트고 엊저녁과 똑같은 식사를 하고(햄 쪼가리 하나 달랑 들어간 마른 샌드위치와 콜라)
해가 중천에서 하얗게 타오르고 슬슬 배가 고파질 무렵.. 드디어 이과수 도착.
여행 초반부에 와하까에서 산 끄리스또발 가던 열 두 시간 밤버스보다 두 배 이상 먼 여행이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어렵지 않았다. 적응도 됐겠지만 아르헨티나 장거리 버스가 좋아서였겠지.
계획단계에서 이 구간을 비행기로 지나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굳이 안 그럴 필요도 없다(별로 볼 건 없으므로). 가격 면에서도 대강 항공 100달러, 버스 60달러 가량이니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시간형편, 기분형편... 그리고 컨디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어떻게 가든 그게 그거라는...
살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동행이 된 스위스 아이와 함께 삐끼를 따라가 세 번째로 본 집에 짐을 내려놓았다. 야자수의 집(Las Palneras)이라는 이름답게 시원한 야자나무들이 둘러싼 집이다. 20페소.
풀장도 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막상 가보니.... ㅋㅋ
터미널에서 만난 칼. 우리 아들녀석과 동갑이다.
짬만 나면 볼리비아에서 샀다는 차랑고를 꺼내드는데, 낯선 악기지만 자기 마음대로 코드를 만들어서 자유자재로 연주를 한다. 처음 봤을 땐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과 무성한 구렛나룻에 땟국물 묻고 솔기까지 터진 셔츠를 걸친 채 차랑고를 뜯고 있길래 걸인이 구걸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깊고 순한 눈에서는 비가 내리는 것 같고 콧날은 흰 초콜렛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선을 보여준다.
음향 엔지니어인데 일이 지겨워서 그만뒀단다. 시작할 때는 좋아하는 일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나. 앞으로는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자기답지 않은 일은 안 할 생각이란다.
차랑고 치는 솜씨를 보니 프로급이길래 밴드 같은 거 안 하냐니까 아마추어 무대에는 많이 서봤지만 나이에 비해 경력이 약해서 이제 그 정도 가지고 밥 먹고 살긴 힘들다고...^^
호스텔 관리하는 아가씨... 이름이 뭐랬더라?
코딱지 만한 방에 8개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나 말고는 몽땅 머스마들뿐이라 숨이 턱 막힌다.
배낭 풀다 말고 리셉션에 가서 다른 방 없는지 물었더니 뒷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혼자 쓰기엔 좀 무서울지도 모른단다.
일단 가보니 건물 뒤쪽에 창고처럼 뚝 떨어진 외딴 방이 하나 있다. 마침 쏟아지는 폭우가 함석지붕을 때리는데 그렇게 감동적으로 가슴을 때려주는 연주는 난생 처음이다. 브라보!!
그날 밤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맥주를 두 캔이나 비웠다.
내가 여기 오게 된 건 어쩌면 이 멋진 밤을 온전히 갖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면 내일 이과수 폭포에 어떻게 가지... 살짝 걱정됐는데
이튿날 아침 날이 거짓말처럼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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