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발랄한 중년일기'는 갱년기 우울증과의 투쟁 기록이라는 것을. ^^
내 나이쯤 된 중년 여성들 가운데 경증이든 중증이든 우울증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뒷바라지할 아이들이 있거나 아직 현직에 있다면 모를까... 혹은 종교생활이나 투자생활이나(요즘은 이것도 재미없을 거다) 연애생활이나 취미생활(혹은 공부생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 앞에 서려면 흩어진 몰골, 흩어진 기분을 추스리게 되니 일삼아 껀수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상태가 좀더 나쁘면 나를 찾는 사람조차 이런저런 핑게로 따돌리게 되는......
저조한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족들 귀가 시간이 가까우면 쫓기듯 어지러운 집안과 마음을 수습하지만
상태가 좀더 나쁘면 집안에 드리운 우중충한 먹구름을 굳이 가리려고도 않게 되는.......
이렇게 병 같지도 않은 병이라 특별히 두통, 소화불량 등 '정신-신체'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무력감 내지 게으름, 심지어 '등 따시고 배부르면 찾아오는 엄살' 정도로 치부당하기 십상이다.
꼭꼭 숨기면 옆지기도 메누리도 모를 수 있는 야속한 게 이 병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이 늪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주 가끔 저조한 기분의 지배를 받는다.
어쩌면 이 우울한 감정이란 건 인간이 평생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주 가까운 감정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조건이야 어떻든 쉽게 긍정모드로 전환할 줄 아는 체질을 타고났기에 이 나이 먹고 나서야 이 감정의 존재를 알게 된 나는 이 낯선 감정이 불편해 죽을 지경....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약을 자주 먹는 편이다.
장복하는 약은 운동, 여행, 글쓰기.
이걸로도 약발이 안 들을 때는 가끔 보조식품을 복용한다.
얼마 전에 '맘마미아'를 먹었다.
적적하지만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무료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마침 남편이 학교에 가는 날이라 저녁준비도 할 필요가 없는 날이었다.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쫓기듯이 뛰어나왔다. 손질을 기다리는 머리는 몽땅 모자 속으로 몰아넣고....
60 넘은 나이도 잊고 펄펄 뛰는 메릴 스트립은 가라앉은 나를 흥분시켰고 나를 울렸다.
손을 잡고 빙빙 도는 결혼식 피로연의 Voules vous와 마지막에 늙다리 아줌마들이 나와 펼치는 80년대식 쇼 장면에서 깔깔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눈물 적은 인간이란 얘길 이 블로그 어딘가에서 했었나?
마음이 우중충할 때는 화면이 아름답고 줄거리 단순한 영화가 좋다.
며칠 전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봤다.
예전에 피렌체가 나온다고 해서 내려받아 보다가 '이거 애들 영화네... ' 하면서 들락날락 대충 봤던 영화였다.
오늘은 완전히 잠겨서 봤다. 가버린 젊은날은 복원되지 않지만 그 향기는 허브향처럼 Healing 효과가 있다. 남에게 들키면 쑥스러울 테지만 기운을 돋궈주니 한번씩 맡아주는 것도 괜찮다.
음악은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약이 되는 게 반, 독이 되는 게 반이다.
요즘은 씁쓸하거나 쥐어짜내는 음악들은 피하고 달짝지근한 레게나 보사노바 같은 것을 찾는다.
가끔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도 챙겨먹는다. 늙어가는 모양이다.
'사람 만나기'도 좋은 보조제다.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히 사는 사람을, 가능하다면 그의 삶이 보이는 현장으로 찾아가 만나면 더 효과적이다.
나의 초췌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사람과 딴짓 딴소리를 하다 보면
내 마음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도대체 뭐였나 우스워지기 마련이다.
공허함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 도무지 시끄럽기만 한 친구, 훈계하기 좋아하는 친구, 과도하게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친구는 잠시 피했다가 내 상태가 좋을 때 만나는 게 낫다. 그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다.
상당히 오랜 기간 두문불출하다가 최근에 귀여운 조카녀석들, 아니 내 눈엔 아직도 귀염둥이일 뿐인 그 조카들이 낳은 아기들을 보고 왔다. 이제 제 몫의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날개를 파닥이는 초보엄마들과 촉촉한 새순 같은 아기들은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던 일상의 고귀함을 일깨워주었다.
엊그제는 책을 몇 권 사왔다.
계획만 서 있지 환율이 천장을 뚫고 나갈 지경이라 언제 떠날진 미지수지만, 아무튼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갔다가 집어온 책들이다. 여행서라기보다는 돌아다닐 동네를 좀더 알기 위한 교양서 쪽에 가깝다.
터키 --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이희철 저, 리수)
개정판 지중해 문명 산책(김진경, 지식산업사)
Mediterranean Europe(Lonely Planet, 2007)
문명은 디자인이다(권삼윤, 김영사)
월든(데이빗 소로우, 동해출판)
집에 오자마자 코를 들이박고는 한나절을 훌쩍 넘겨버렸다.
점점 잡기 어려워지지만 잡고 나면 으쓱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같은 시각정보지만 TV나 컴퓨터에 비해 사색이라는 능동적인 활동이 끼어들 여지가 많아 그럴 것이다.
너무 오래 책과 떨어져 산 것도 내 무력감의 한 원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읽다 밀어둔 '바다의 도시 이야기'도 이참에 다시 읽을 생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꼼꼼히 다시 읽어보고 싶다. 혹시 좀 빌려주실 분? ^^
오늘은 햇살 좋은 월요일, 이번 주부터 단풍이 절정이란다.
삶의 모든 순간이 행복해질 기회라는 걸 잊지 말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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