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를 뒤로 제낄 수도 없는 맨 뒷좌석이라 허리를 90도로 세운 채 오후 3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꼬박 16시간을 달렸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되어 서버린 버스는 그 후로도 길거리에서 한 시간 넘는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서야 우리를 버강(Bagan)에 내려주었다.
자동차 수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부 정책 때문에 미얀마에서는 새 차가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일찌감치 폐차되었어야 마땅한 차들이 영업용 택시로, 장거리 버스로 맹활약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 익숙한 미얀마 사람들은 중간에 버스가 서도 불평은커녕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버스의 빠른 쾌유를 빌 뿐이다.
도착하면 열일 제쳐두고 우선 반나절 쉬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깊은 피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왈칵 달려드는 거대한 황금사원 앞에서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웅 우의 랜드마크, 쉐지공 퍼야
여기는 천 년 전에 미얀마 최초 통일왕국인 바간 왕조가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던 곳이다. 당시 귀족들이 앞다투어 부처님께 지어바쳤던 불탑들이 역사와 자연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2,227개나 살아남은 대단한 유적지. 겨우 이삼일 밖에 배정할 수 없는 일정 동안 이 거대한 불탑의 숲 속에서 나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올드 버강을 돌아보려면 주로 horse cart라고 불리는 마차를 이용한다. 마부 옆에 한 사람 타고 넓게 담요가 깔린 뒷자리엔 두 사람이 더 탈 수 있다. 자전거를 빌려타고 돌아다닐 수도 있지만 지역이 상당히 넓기 때문에 꽤 힘들 것 같다. 무엇보다도 고풍한 도시를 마차 타고 누벼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니.....
마부 Wini는 샨족이다. 서른이 넘었는데 어머니와 다섯 동생들을 먹여살리느라고 아직 장가도 못 갔단다.
말수는 적지만 잘 웃는다. 말을 모는 소리도 속삭이듯 하는 걸 보면 성격이 온순한 사람 같다.
처음 도착한 곳은 버강에서 두번째로 높다는 틸로민로 사원 유적지.
아무도 없는 사원 앞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소년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이 곳에서 그림을 파는 소년이었다.
유적지도 사원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좀 특이한 부처님과 빛 바랜 벽화들을 보고 나서 가파른 계단을 뱅뱅 돌아 세 층을 올라가면
근사한 사원 숲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우리가 사원을 한바퀴 둘러보고 나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부 위니의 친구라며 우리 마차 뒤꽁무니를 붙잡고 바짝 따라오던 총각이었다.
전직 승려였던 이 사람은 6년 전에 캄보디아로 출장을 가서 앙코르 왓 벽화 복원사업에 종사했었다고 한다.
그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들은 모래에 색을 섞어 그린 탱화들인데 솜씨가 제법이었다.
자기 친구가 손님을 태우고 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 장 팔아보려고 급히 따라온 모양인데, 한 자리에 눌러앉아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손님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부지런한 사람인 듯.... 오후에 각기 다른 유적지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다.
두번째로 방문한 곳. 우 뻘리 떼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디였지, 도대체?
사실 이런 고민은 내게 무의미하다. 그러나 찜찜하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몹쓸 범생이 습관.. ㅜ.ㅜ
불상과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어쩐지 중국 돈황 벽화가 연상된다.
이곳의 벽화가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면서 누렇게 빛바랜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를 펼쳐보이는 한 아저씨.
자원봉사자인지 직업해설가인지 모르겠지만 도시락까지 싸들고 와계신다.
이곳 역시 기념품 파는 상인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이미 마차에 올라탔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기를 쓰고 따라오는 꼬마...
500미터 이상을 따라온 끈기에 감복하여 누구에게 선물하기도 민망한 조잡한 엽서를 결국 사주고 말았다.
얘야, 넌 뭘 해도 꼭 성공할 꺼야.
달려라, 달려!
여기는 옛 성벽 터인 따랑하 게이트
땃빈유 퍼야? 적어두긴 했는데 확실한지 모르겠다.
부처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미얀마 전통 신앙이라는 낫을 모신 제단도 있었다.
이곳 사람들과 말 한 마디라도 더 섞어보려는 내 심중을 읽기라도 한 건지, 후배는 대충 놔주고 내게만 벌떼같이 몰려오는 아이상인들. Where are you from? 과 숫자밖에 모르는 짧은 영어만 가지고도 씩씩하게 달려드는 이 아이들에게선 앵벌이 장사꾼에게선 볼 수 없는 생기가 흘러넘친다.
이렇게 생글대며 끈질기게 따라오니 나 참...
여기가 네 번째로 방문한 아난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아름다운 유적지다.
정교하게 꾸며진 탑들. 공예품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부처님의 의상 좀 보시게..
아난다 퍼야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 '다나까'를 만들어 파는 아주머니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다나까는 미얀마 사람들이 애용하는 화장품으로, 100% 천연재료로 만들어진다.
ㅎㅎ 나도 미얀마 사람들 같이 됐다. 옆에 선 아이들은 방콕에서 양곤 올 때 만났던 프랑스 소녀들.
집안에 무슨 경사가 있는지, 대가족이 미니버스를 타고 도착하여, 조용하던 유적지가 시끌시끌해졌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 아가씨가 어디서 왔느냐며 말을 붙이더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잔다.
졸지에 단체사진이 되어버렸다. '온니, 살랑해요!', "주몽 짱이에요!'
(미얀마에서는 '주몽'과 '해신' 등 한국 드라마가 공중파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 새 점심 때가 됐다. 위니의 안내로 미얀마 정식을 한다는 식당으로 갔다.
등등등... 반찬은 많았지만 크게 감명을 주는 음식은 없었고
나는 후식 쪽이 마음에 들었다.
튀긴 마늘과 땅콩, 종려나무에서 채취한 설탕으로 만든 사탕과자, 참깨와 찻잎을 찧어 섞은 것 등등..
점심을 먹고 나니 살인적인 땡볕이 쨍쨍.
락시(인도식 요거트) 한 잔씩 시켜놓고 식당 옆 그늘에서 휴식 중.
문득 시선이 간 곳에 덩그라니 걸린 중국산 도화지 장식품이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점심을 먹은 곳은 칠기 제조로 유명한 동네라고 했다.
이 동네 사람들도 점심준비로 분주하다.
이 동네 노천까페들은 이미 최고의 인테리어를 갖추었으니 간단히 테이블만 놓으면 된다.
아난다 퍼야 인근 구바욱지 퍼야....라고 적어놨는데 정작 퍼야 사진은 없다. 혹시 이건가?
어쨌든 부처님의 혹은 조상님의 음덕에 입어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얘들도 뭔가를 굴리며 논다. 굴렁쇠가 아니고 자전거 타이어..
이건 또 무슨 퍼야더라? 마하보디 퍼야?
(듣고 바로 적어두지 않으면 절대 기억 못한다. ㅜ.ㅜ )
암튼 이곳에서 기념으로 롱지(치마) 한 벌 샀다. 안경 벗고 머리만 틀어올리면 영락없는 미얀마 아낙인데... ^^
사원구경이 끝도 없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신발 벗고 신는 데도 지쳤고...
슬슬 사원 구경이 지겨워져갈 즈음 도착한 강변의 밍글라떼 사원.
버강 왕조의 마지막 왕이 몽고군에게 쫓겨 피신했던 곳이라고 한다.
강가에 있는 절이라 그런지 이 사원은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황금색 종과 사자상 옆에 있는 귀여운 조각상(낫 정령)도 이 사원을 기억하는 데 한몫 했고....
마부 위니의 친구라는 사람이 와서 사원 바로 옆에 보트 선착장이 있으니 메콩강을 따라 흘러가며 석양에 물드는 사원 구경을 하라고 권했다. 이 사원은 보트 트립 때문에 유명한 모양이다.
잠시 솔깃했지만, 그 유명한 쉐산도 사원의 일몰을 놓칠 수 없기에 우리는 발길을, 아니 말머리를 돌렸다.
넒은 벌판 한 가운데 쉐산도 사원을 비롯한 크고 작은 벽돌 사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헌데, 나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일몰을 보려고 올라갔던 사원이 쉐산도 사원이었는지...
이제 와 사진을 들춰보니 쉐산도 사원으로 보이는 사원이 저 멀리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
아니, 사실은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르겠다. 15배 줌으로 땡긴 J의 사진을 보아도....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천 년 전의 유적지와 더불어 기울어가는 햇살 속에 깃들었으니... 만족한다.
일몰이 멋지든 안 멋지든 관광객이 많든 적든 농부는 변함없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뿐이다.
그 옛날 왕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절을 지을 때도 그랬을 것이고...
장삿꾼들은 놀멘놀멘 그림을 팔고....
구경꾼들은 날이 저물면 돌아가고...
버강 유적지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간다.
웬일인지 그날은 일몰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잊혀진 벌판에서... 누가 기억하든지 못하든지 묵묵하게 그 긴 세월의 풍상을 버텨온 크고 작은 탑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이었다.
Bonus!!
버강 유적지에 계신 부처님의 얼굴들 구경하세요. 사진은 J가 찍었고 인심은 제가 씁니다. ^^
사실 전 불교도 건축도 미술도 문외한지라 버강 유적지의 30%도 채 못봤지 싶습니다만
제 동행 J의 카메라는 유적지 구석구석에 숨은 매력들을 정말 살뜰하게도 잡아냈답니다.
그 사진들 중 제 시선을 끈 것은.... 부처님의 얼굴 사진들이었죠.
그걸 보기 전까지 전 부처상의 표정들이 그렇게 다양한 줄 미처 눈치채지 못했거든요.
인자하신 부처님, 유쾌한 부처님, 까다로운 부처님, 무서운 부처님, 요염한 부처님, 장난스러운 부처님...
이제 저도 부처님을 좀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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