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고락을 함께 하던 JM을 보내고 나니 그야말로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동안 정해진 루트, 정해진 시간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내겐 사실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그건 JM 탓이 아니라 애당초 함께 잡은 스케줄 때문이긴 하지만 둘이 함께 다니는 상황이 그 스트레스를 좀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만든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아 후회할 이유도 없다. 이 숨가쁜 스케줄 아니었더라면 그 길고 긴 베트남 땅덩어리를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헐레벌떡 모드가 여행의 감흥을 반감시켰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 베트남에서 썼던 일기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사실의 나열 뿐 감흥이 없다.
홀로 남게 된 지금부터가 뻔해져가는 여행길을 조금이나마 유연하고 촉촉하게 바꿔갈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딱 하룻밤 밖에 안 남았지만 굳이 숙소를 옮겼다. 20불짜리 더블베드 룸에서 6불짜리 싱글베드 있는 숙소로.... 이제부턴 확실하게 내 모드로 간다는 의미에서.
민속박물관에 가려고 호안 끼엠 호수변으로 나가 버스편을 물어보니 바로 앞 로타리에서 14번을 타란다.
버스에 올라가 안내군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민속박물관을 짚으니 염려 말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참 먼 운전석에서도 그걸 어찌 보았는지 안내군에게 저 아줌마 어디 간다느냐고 물어본다. 옆에 앉은 아줌마도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괜히 참견이고... 오늘따라 사람들이 왤케 친절한 거야? 난 단지 릭샤에서 시내버스로 옮겨탔을 뿐인데....
거리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어제보다 훨씬 한산하지만 사람들 모여 있는 곳마다 즐거운 분위기가 넘쳐난다. 귀성하는 사람, 선물 고르는 사람..... 거리 곳곳엔 새해 집단장용 복숭아꽃 나무와 귤나무가 주인을 기다리느라고 길게 줄을 서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잘살아지고 있다는 실감에 즐거워 어쩔 줄 모르던 2001년 상하이의 설풍경이 생각났다.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도 베트남은 여전히 활기가 넘쳐 보인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뽀뽀놀이를 하다가 나의 카메라 공격을 받고는 깜짝 놀라던 꼬마커플. ㅋㅋ
민족 박물관 갔던 얘긴 어제 올린 글에서 미리 했고....
민족박물관에서 나와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文廟로 갔다.
이번에는 어디서 내려야 하냐고 굳이 묻지 않아도 됐다. 정류장에 서기 한참 전부터 수령 몇백 년씩은 됨직한 우람한 나무들과 널찍한 녹지대가 나타나 목적지에 가까웠음을 알려주었고, 정문 쪽에는 검은 이끼가 내려앉은 비석인지 돌기둥인지가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門外門
門外門
또 門外門 , 그리고 빨간 구두 아가씨.... ^^
공자는 신도 아닌데.... 절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한 처녀는 유학자들 비석 앞을 지나가며 하나도 빼지 않고 절을 한다. 아마 무슨 시험을 앞둔 게 아닐까.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오래된 정원 분위기
문묘에서 나와 이젠 좀 걷기로 한다. 가능하다면 대성당을 거쳐 호안 끼엠 호수까지 걸어가볼 생각이었다.
1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계속 길을 물어가며 걸었더니 지루한 줄도 모르겠다.
이게 내 방식이다. 목적지에 가도 좋고 안 가도 그만인 이 순간이 너무나 좋다. 동행이 있으면 헤매고 더듬고 버스 기다리고... 하면서 맘껏 개길 수가 없잖아. ^^
오홋! 기찻길이 저리도 좁은 동네골목을 빠져나가다니....
호치민 가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겠지? 현재도 사용중이겠지?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다)
오거리가 나와 헷갈리기에 또 어떤 아저씨를 붙잡고 대성당 가는 길을 물어보니 베트남 말을 한다. 걸어서 못 간다고 택시 타라는 얘기 같은데.... 나 베트남어 모른다고 하니 영어로 다시 얘기해주는데 딱 들어보니 한국사람이다. 베트남 사람처럼 생기기도 했고 베트남어도 잘하는 이 아저씨, 사업하러 와서 정착한 지 6개월 밖에 안 됐다는데 어째 저리도 감쪽같은 베트남 사람일까. 헌데 나도 베트남 사람처럼 보였던 걸까? 어째 내게 베트남 말을 했을까. ㅋㅋ
자기 약속장소가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데 마침 택시를 타려는 참이었다고,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단다.
아저씨, 그건 제 즐거움을 뺏으시는 거예요. ^^ 사양하고 계속 걸었다.
오늘은 까치설날...^^
종아리가 뻐근해질 무렵 도착한 대성당..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본떠 지었다는 건축물도 근사하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이끼가 더 근사하다.
1886년 크리스마스 때 준공했다고 한다. 이 낡은 성당에서도 금요일 저녁에 미사를 본단다.
한국에서 온 중년의 패키지팀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근처에 간단한 십자가가 붙은 건물이 있어 개신교횐가 하여 들어가보니 가톨릭 재단에서 하는 유치원이란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수녀님이 나와 성당구경하겠느냐고 한다.
카톨릭 교회가 하노이에 딱 두 군데밖에 없단다. 사이공에 비하면 놀랄 일이다.
소박하고 장식 없는 성당. 수녀들도 그냥 검은 옷에 두건도 안 썼다.
베트남에서 처음 받아보는 대가 없는 환대가 어찌나 신기하고 고마운지 연신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성당에서 호수는 금방이지만 호수라고 다 같은 동네가 아니다. 호수가 워낙 크기 때문에...
도착한 지점은 호텔에서 가까운 호수의 반대편... 호숫가에 앉아 파인애플 까먹으며 다리쉼을 하고
다시 힘을 내어 마저 한 바퀴.
공원에서 만난 할머니들. 꼿꼿한 자세와 하얗게 드러난 건치를 보니 건강하고 즐겁게 사시는 분들 같다.
말이 안 통하면 어떠랴. 이 넉넉한 웃음 하나면 충분하다.
숙소쪽을 바라보고 호수변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 뭔가 요란한 게 또 보인다. 다가가보니....
黎(레)왕조의 뒤를 이어 李왕조를 열었던 리타이토의 동상이었다. 제도를 정비하고 참파왕국을 몰아내 영토를 넓히고 불교를 숭상하고 송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며 베트남 왕조시대의 전성기를 구축했던 인물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화산이씨가 베트남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도 한국의 화산이씨들은 명예 베트남 국민 신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수월한 점이 있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화산이씨가 한 말이라 그게 사실인 줄로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으나....그래서 훼에서 만난 베트남 의사에게도 너희 역대 왕 중 하나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고 잘난척까지 했는데... 사진을 올리면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정선 이씨와 화산 이씨
우리나라 토착 성씨 중 귀화 성씨 수는 136개 성씨가 있는데 그 중 베트남과 인연이 있는 성씨로는 정선이씨와 화산이씨가 있다. 이 두 성씨는 12세기와 13세기 안남국의 황자가 우리나라에 와 정착함으로써 얻은 성씨다.
정선이씨의 시조는 안남국 왕자 이양곤으로, 안남국 5대왕인 신종이 된 형 이양환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신변의 위험을 느껴 고려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그의 5대손 중 이의민은 고려 의종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해 큰 공을 세웠고 정중부와 경대승에 이어 무려 14년간 고려를 통치했던 인물이다.
12세기에 정선 이씨가 고려에 온 이후 13세기에는 또 다른 월남인이 우리 땅에 왔는데, 그는 안남국 제7대 고종의 동생인 이용상이다. 당시 이씨 왕조는 8대 혜종을 끝으로 진씨에 의해 무너지게 된 상황이었다.
이용상은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공을 세워, 고려왕조에 의해 <화산군>에 봉해졌고 이로써 그는 화산이씨의 시조가 된다.(출처 : 다음블러그 '황제의 부활')
허걱! 거꾸로 알고 있었다. 웬 망신이냐...
'아무럼 어때요, 어쨌든 한국은 베트남과 형제국인 거 맞아요.. !!'
어느새 저물녁이다.
수상인형극이나 볼까 하다가 관광객이 나라비 선 걸 보니 오랜만에 자유로워졌는데 다시 관광객 속으로 들어갈까보냐 싶어 그냥 호숫가를 배회한다.
간만에 한국식당에서 콩나물 국밥 시켜 눈물콧물 다 빠치며 배부르게.... ^^
배처럼 생긴 건물 4층을 쓰고 있는 저 식당에선 호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화룡관에서 내려다보는 로터리 부근 풍경에 꽂혀서 찍고 또 찍고....
호 아저씨(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이다), 안녕?
시장 골목 길거리 식당
신까페, 한까페, 김까페....
처음엔 왜 여행사를 까페라고 부르나 어리둥절했는데 거리 곳곳에서 워낙 많이 접하다 보니 곧 익숙해졌다.
신까페가 워낙 유명해서 그런가 신까페 벽에는 '가짜 신까페를 조심하세요'라는 경고문구도 붙어 있다. ^^
참고로.... 신까페는 노랑머리들이 많이 이용하고 살짝 비싸다.
우리가 오픈버스투어 예약했던 곳은 한까페였다. 주로 현지인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가격은 살짝 싸지만 픽업서비스 등에서 2% 부족하다. 그래도 현지인들과 섞일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크다.
음, 멋지구리... 영화 씨클로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숙소로 돌아오니 온 몸이 물먹은 솜 같다.
그동안 고단하게 돌아다니긴 했나 보다. 눈 코 입이 다 공격당하고 있다. 코 안에 들어섰던 바위는 죽염을 꾸준히 썼더니 자갈로 변했지만 이제 입가에 꽈리가 새롭게 튀어나왔고 왼쪽눈꺼풀도 모기에 한 방 쏘여 안 그래도 두툼한 눈이 완전 심술보를 덮어썼다. 우연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걱정이군. 이제 라오스에서는 좀 천천히 다녀야지...
베트남에서는 한국 방송이 많이 나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방송으로는 아리랑 TV와 KBS world 채널이 나오고 다른 베트남 방송 곳곳에서도 한국 드라마를 방영해주는데, 제발 막장 드라마 같은 건 좀 수출 안 했으면 좋겠다. 베트남 사람들 중엔 한국어 공부하려고 더빙없이 볼 수 있는 아리랑 TV를 많이 본다는데, 저게 뭐냐... 아버지가 아들의 여자를 탐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막말을 하고...한국 사람들은 다 저렇게 사는 줄 아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채널을 돌려보니 <꽃보다 아름다워>가 방영중이다. 베트남어로 더빙했는데 진짜 웃기는 건 여러 성우가 하는 게 아니라 한 여자 성우가 남녀노소 목소리를 다 낸는 거다. 신파극 변사처럼. ㅋㅋ
'여행일기 > 아시아(중국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오스1( 비엔티엔) - 당신의 행복은 얼마짜리? (0) | 2009.07.16 |
---|---|
베트남12(하노이4) - 하노이에서 비엔티엔으로 (0) | 2009.06.22 |
베트남10(하노이2) - 박물관 세 군데 (0) | 2009.06.18 |
베트남9(하노이1) - 하롱베이 수다 투어 (0) | 2009.06.15 |
베트남8(훼) - 훼에서 만난 사람들 (0) | 200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