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으로 가는 비행기 시각이 오후 네 시쯤이었으니 오전에 한 군데 더 뛰어도 될 만 한데,
켜놓은 TV에 무심히 눈길을 주다 그만 연속으로 방영되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원래 연속극은 잘 안 보는데 더군다나 그 드라마 할 때가 중국에서 위성안테나 안 달고 살 때라서... 정작 소문이 짜할 땐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였는데.... 일단 시작하니 눈을 뗄 수가 없다. 12회에서 보기 시작하여 종영분인 15회까지... 체크아웃 시간 절묘하게 맞춰 끝냈다. ^^
우연의 남발, 엽기적인 설정.... 그런 거 아니면 요즘 드라마들은 도무지 스토리를 끌고 갈 힘이 안 생기는 모양이다. 어쨌든 소지섭이 죽어가는 걸 보니 혼자 길 떠나는 심정이 완전히 우중충해져버린다.
하루 먼저 하노이 공항을 빠져나간 JM으로부터 출국세 안 내니 베트남 돈 남길 필요 없다는 메일이 와서 졸지에 24만 5천동이 남았다. 음료수 하나 마시는 것도 고려에 고려를 거듭하며 아꼈는데.... 돈은 남고 돈 쓸 시간은 없고.... 생필품은 이럴 때 사두는 것이다. 하노이 공항 면세점에는 Esse가 있다. ㅋㅋ
돈도 여유 있겠다, 다시 화룡관을 찾아 불고기백반으로 배 터지게 점심 먹고 택시를 잡았는데 30만 동 부른다.
호텔 리셉션에서 불러주는 택시요금이나 비슷하잖아. 이건 아니지.
베트남의 바가지요금은 이미 소문 다 난 일이고 시간 여유도 있으니 호치민에서 당한 거 여기서 한번 만회해볼까 싶은 오기가 발동, 작정하고 흥정 들어가보는데.....
20만 동을 부르면서 줄 서 있는 택시들을 보내고 보내고 하니까 시클로와 오토바이 운전사들까지 덤빈다.
공항 간다는데도 막 타란다. 너네 공항까지 못 가잖아, 뿌리쳐봐도 2킬로 떨어진 베트남 항공 리무진 정거장까지 데려다준다고 야단이다. 웃기셔.. 비행기 시간 아니면 해봄직한 탐험이지만 1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가 방금 떠났다면 그런 낭패도 없지.
세 번째 택시 기사가 22만 동에 가겠다고 해서 올라탔는데 앞에서 나랑 흥정하던 택시 기사가 와서 문을 발로 걷어차며 핏대를 올린다. 빈 택시 많은 곳이 흥정하기 좋을 줄 알았는데 기사들끼리 담합을 하니 오히려 그 반대인 모양이다.
헌데 동료들 눈치 봐가며 어렵사리 나를 태운 택시 기사, 10분도 채 못 가더니 기다리던 다른 택시로 날 옮겨 태운다. 말이 안 통하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처음 탔던 택시는 공항에 못 들어가는 택시인 것 같다. 근데 이건 또 뭐야, 내가 타고 온 택시 기사가 커미션을 챙기고 가버리자 영어가 좀 되는 두 번째 택시 기사가 새로 흥정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분명히 얼마에 가는 손님이란 얘기가 된 것 같은데 사람 없다고 안면을 바꾸다니.... 하도 괘씸해서 ‘이미 흥정한 가격 이상은 줄 수가 없다. 가진 돈이 딱 그것 뿐’이라고 딱 잡아뗐다. 달리면서도 쉬지 않고 흥정을 시도하던 이노무 기사, 내 단호한 거절에 화가 났는지 갑자기 ‘너 입에서 나쁜 냄새 난다’ 글쎄 이러는 것이다. 내가 불고기와 함께 생마늘을 먹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모욕을 주다니.... 나쁜 넘!
마음 상하는 일은 또 있었다. 출국 소지품 검사에서 스위스제 잭 나이프를 뺏긴 거다. 짐에 넣어 부치면 되는데 소지섭이 죽는 바람에 정신줄 놓았나보다. 유럽 연수 다녀온 시누이로부터 선물로 받아 오 년 이상, 특히 여행길에서 내 사랑을 듬뿍 받았던 녀석인데.... 아무리 애교를 떨고 애원을 해봐도 소용이 없다. ㅜ.ㅜ
공항 대합실에서는 동포 세 명을 만났다. 설 휴가에 중3짜리 아들과 라오스 여행길에 나선 40대 아저씨와 라오스에 정착한 친구네 놀러간다는 60세 전후의 아저씨.
모 은행 베트남 지점에서 파견근무중이라는 젊은 아저씨는 올해로 하노이 생활 2년차라고 했다.
하노이에 (등록된) 베트남 교민이 3000명 밖에 안 된다고 해서 놀랐다. 호치민에 5만 명 이라고 들었는데.... 비즈니스 여건은 호치민 쪽이 훨씬 나은가보다.
내가 살았던 1997년의 중국을 떠올리며 베트남 사회주의의 현주소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더니 과연 중국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대학 진학, 결혼, 취업 등을 통해 대도시 호구(출생시에 등록한 출신지)를 획득할 수 있게 했다든지, 공산당 권력이 여전히 막강하여 젊은이들이 출세를 위해 당원이 되려고 노력한다든지(호치민에서는 별로 안 그럴지도 모르겠다), 종교활동을 엄격히 통제한다든지.....
특히 지역간 빈부격차나 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중국사람들과 비슷한가보다. 베트남이 생각보다 잘 사는 것 같다고 했더니 대도시만 봐서는 모른다고.... 省에 따라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하노이의 경우 주5일 근무 기준 최저임금 100만 동이지만 주 70시간 노동에 80만 동도 못 받는 省도 수두룩하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인민들도 여전히 많단다. 언젠가 하노이에서 두 시간 떨어진 민빈 지역에 가보니 집안 세간이 열 개도 안 되는 가난한 가구들이 수두룩하더라나.
아, 민빈! 거기는 내가 하노이 들어오던 날 새벽에 꿈같이 지나간 지역이었다.
희부연 여명에 눈을 떠보니 하롱베이에 떠 있는 섬들 같은 것이 창밖에 어른거린다.
야트막하게 줄지어 선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논밭, 기찻길.... 모래강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모형빌라촌처럼 생긴 묘역들.... 안개에 휩싸여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던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그만 하노이고 뭐고 다 접고 당장 내려버리고 싶던 그곳이 바로 민빈이었던 거다.(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인도차이나'를 찍었던 곳이자 관광지로도 유명한 땀꼭이 그 부근이다.)
내가 본 모형빌라들은 전통 장례방식에 따른 假墓란다. 그곳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 가족묘로 이장한다나.
그런데 왜 강가에 묘역을 만들었지? 뒤늦게 철 든 청개구리가 엄마 무덤 떠내려간다고 땅을 치고 울었다잖나.
베트남 여행중에 단편적으로 귀동냥해왔던 왕조사의 빈 부분에 대해도 ‘혹시....아시는지’ 하며 조심스레 물었더니... 안 물어봤으면 서운할 뻔했다. 옆에 있는 아들도 함께 들었으면 하시는지 성의를 다해 베트남 왕조사에 대한 명강을 펼치신다. ^^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시는 분 같다. 덕분에 탑승을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즐겁고 유익했다.
친구네 놀러간다는 아저씨는 오늘 새벽에, 영하 13도의 폭설을 뚫고 대구에서 출발하셨단다. 비엔티엔 가는 직항 편이 없어서 환승 대기중이시다. 은퇴 후 자주 라오스에 드나드셔서 라오스 사정에 꽤 밝으신 듯했다.
라오스에 사업하러 드나드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모양이다. 베트남에서 사업실패를 겪었지만 라오스에서 다시 일어서 지금은 매년 1억 넘게 기부도 하고 학교도 지어주며 라오스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분도 있지만 라오스 처녀에게 소 사준다 집 사준다 꼬이며 결혼하자고 해놓고는 그 처녀 친구에게도 소 사준다 집 사준다 결혼하자고 꼬이다가 두 처녀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혀 벌금 500만 원 물고 쫓겨난 영감님도 있단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날았나보다.
공항은 고속터미널 만하지만 아담하고 깨끗하다. 마침 노을이 져서 더 인상적이었다.
픽업 나온 대구 아저씨 친구분이 고맙게도 숙소 동네까지 태워다주신단다.
Syriz Guest House 앞에 내려주시길래 들어가보니 빈 방이 없다. 그곳 뿐 아니라 대로변에 주욱 늘어선 모든 게스트 하우스가 full 아니면 30달러짜리밖에 없다.
골목골목 발품 팔아 겨우 십만 낍(12.5달러)짜리 방을 구했다.
물가가 너무너무 싸다고 들었던 라오스의 방값이 이렇게 비쌀 줄이야. 아침도 안 주는데.... 라오스에선 250만 낍(300달러)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다간 턱없이 모자라겠다.
(ATM에서 현금을 뽑으면 뽑을 때마다 수수료가 빠지기 때문에 나는 그 나라에서 쓸 비용을 대강 계산해서 한번에 뽑아버린다. 그런데 라오스에서는 한 번에 뽑을 수 있는 한도액이 칠십 만 낍 밖에 안 된다.
라오스에 머무는 동안 세 번 뽑았고 막판에 모자라 50달러를 환전해 썼다. 첫날 방값에 놀라 좀 긴장한 덕분에 어지가히 예산을 맞춘 셈이다.)
오늘 글에는 올릴 사진이 하나도 없다. 경쟁적으로 찍어대던 JM과 헤어진 후유증인가보다. ㅎㅎ
'여행일기 > 아시아(중국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오스2(방 비엥) - 빈둥거리기 좋은 강가 마을 (0) | 2009.07.16 |
---|---|
라오스1( 비엔티엔) - 당신의 행복은 얼마짜리? (0) | 2009.07.16 |
베트남11(하노이3) - 하노이 시내 여기저기 (0) | 2009.06.18 |
베트남10(하노이2) - 박물관 세 군데 (0) | 2009.06.18 |
베트남9(하노이1) - 하롱베이 수다 투어 (0) | 2009.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