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중국 연속극에 푹 빠졌었다. 남편 때문이다. ㅎㅎ
석사논문 마친 해방감을 만끽하며 쿡 TV 탐색에 나서신 남편님,
처음엔 다큐멘터리 다시보기를 돌리시더니
에고고... 어쩌다 무협의 세계에 발을 들이셨네그려. (정확히는 무협이 아니라 중국 사극-- 연속극이다)
이 냥반이 보기 시작하면 아주 뽕을 뺀다는 건 내 일찍이 알아봤다. 내가 수험생 아들 따라 한국에 나올 때 혼자 두고 나오는 게 딱해서 DVD로 나온 대장금, 명성황후, 상도, 허준 등등을 구해놓고 갔더니 두 달여 만에 다 봐치웠던 전력이 있다. 그때는 지금보다 출장도 잦고 훨씬 더 바쁠 때였는데....
이번에는 36회짜리 손자병법, 44회짜리 옹정제, 40회짜리 대택문을 약 3주만에 완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주말에는 평균 8회, 주중에 퇴근하고 와서는 최소 2~3회씩.... 같이 보면서도 그 놀라운 집중력인지 지구력인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네그려.
원래 나는 무술 액션 전쟁.... 이런 류의 화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손자병법' 시작할 때만 해도 가끔 곁눈질이나 할 정도였는데,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궁금하여 잠깐 옆에 앉았다가 나도 모르게 손빈 편을 들게 되고 다음 스토리가 은근히 궁금해지는 거다. 결국 손빈이 齊나라로 돌아온 즈음에 합류했다.
내가 안 본 부분까지 돌려볼 정도로 열성적이진 않았지만 36회가 다 끝나고 나니 어찌나 허전하던지....
한편 더 돌리자는 데 흔쾌히 합의하여 다시 '옹정황제' 시작.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는 부친의 승하로 8세에 즉위한 이래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15만 명 남짓한 소수민족을 가지고 그 100배가 넘는 1억 5000만 명의 중국 한족을 이끌어간 강하고도 현명한 리더십의 소유자. 권력 주변을 현명하게 정리하고 잦은 원행을 불사해가면서 민심을 살폈던 덕망있고 부지런한 군주.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꼽는 가장 큰 그의 매력은 권력자가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었을 소탈함과 지적 호기심까지 갖춘 군주였다는 점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미국인 중국사학자가 쓴 책인데 강희제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는 독백 형식으로 쓴 좀 독특한 책이었다. 제목이 '강희제'였던가?)의 영향일 것이다.
부족간 단합을 위해 무수한 비빈을 거느렸던 그는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는데, 황태자로 봉한 둘째아들이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아들의 황제수업을 강희제 자신이 직접 챙겼건만) 폐태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황제 자리를 두고 황자들 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그 시점에서 시작되어 강희제 시대를 1/3 정도 할애한 후 옹정제로 넘어온다.
그 많은 王爺들 가운데 유능하고 집념이 강한 8王爺보다는 의협심이 강하고 이익에 급급해 하지 않는 13王爺와 권력에 초연하게 시문을 즐겼던 3王爺가 내 눈에 든 걸 보면 나도 권력투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감상적인 인물인 게 확실하다. 덕이 뛰어나지만 유약한 면을 감추지 못했던 옹정제(4王爺) 역시 그런 부류로 보인다. 우좌지간...
일반적으로 기승전결의 짜임새 속에서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영화와는 달리 연속극은 십중팔구 2/3 지점부터 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매주 2회씩 감질나게 볼 때도 그런 느낌이 오는데 매일 3회씩 혹은 5회씩 쉬지도 않고 주구장창 돌리다 보면 지겹다 못해 멀미가 날 지경이지. 그래서 왕자들간의 피튀기는 황위다툼이 진정되고 옹정제의 힘겨운 부패청산 노력이 윤곽을 드러낼 즈음 이 뒷심 딸리는 아줌마는 들락날락 보기 모드로 전환하고 말았다. ㅋㅋ
지치지도 않는 남편의 사극 사랑.... 다음 사냥감으로 걸려든 게 大宅門이다.
요건 너무너무 재밌어서 나의 금쪽같은 여가시간을 다 잡아잡수셔도 아깝지가 않더란 말씀.
오늘날까지도 중국 제약업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동인당약국 이야기다.
극중에서는 白草廳이라는 상호명으로 나온다.
2001년에 중국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이 연속극을 어째 나는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니 그때가 한국학교에서 일할 때다. 한국사람에 둘러싸여 중국 사람들의 생활과는 멀어졌었나보다.
북경 최고의 약방으로서 부와 명성을 누리는 백씨 가문은 원래 딸랑딸랑 종을 흔들며 약초를 팔러다니던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이 극의 모델이 된 실제 가문은 樂씨). 이 가문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난 주인공은 태어날 때도 울지 않고 엉덩이를 때려도 웃기만 하여 京奇라는 이름을 얻은 특별한 아이. 그러나 이 아이의 탄생은 가문의 위기를 예고하는데.
아들이 태어나던 날 황제의 친척집에 왕진을 나갔던 백경기의 아버지는 큰 옹주에게서 喜脈(胎脈)을 짚어냈지만 그녀가 시집 안 간 처녀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王爺의 노여움을 산다. 부와 명성은 지녔어도 권력이 없는 백씨가문에게 그 정도는 견뎌내야 하는 불명예였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백경기의 할아버지는 설욕을 다짐하고, 결국 출산일을 기다려 지난날 모욕에 대한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황제의 친척 가문과 척을 지게 된다.
이 두 가문 간의 원한관계는 뒷날 더 큰 복수와 앙갚음으로 발전하고....
얘기가 더 재밌게 되느라고 청년이 된 백경기는 이 원수집안에서 버림받은 사생아 딸과 인연을 맺게 되고....
뭐 이런 식으로 줄거리는 파란만장하게 얼키고 설키면서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마지막까지 자극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가 아니다.
인기있는 드라마의 공통된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백경기는 무너져가는 백씨가문을 다시 일으킨 창의적이고 대담하고 인간미도 있는 인물이지만
즉흥적인 성격에 성깔이 나면 앞뒤 안 가리는 꼴통이다.
집안에서 내쳐지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원수집안 출신의 조강지처를 지켜냈지만 어느새 정부 고위층이 애지중지하는 기생을 빼앗기 위해 감옥살이를 불사하는 또다른 애정활극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열네 살짜리 '개 보모'(어머니의 애완견을 돌보는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정실부인을 삼기도 한다.
집안의 골칫거리인 삼촌에 대해서는 주먹질도 서슴지 않지만 모친의 노망에 가까운 요구 앞에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즉 好惡가 뚜렷하고 자존감이 넘치는 인물.
기분파인 데다 성격이 불같아 실제로 곁에 있으면 괴로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를 끄고 잠자리에 누웠어도 그 눈빛, 미소, 손동작이 눈앞에 오락가락 할 정도로 그에겐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
이 흥미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킨 건 기본적으로 작가의 공로겠지만, 배우의 몫도 그에 못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젊지도 않고 미남도 아닌 陳寶國이다. (따져보니 이 드라마를 찍을 때 그는 이미 50고개)
백경기 못지 않는 비중의 또 한 인물.... 백경기의 모친이자 백씨 가문의 둘째며느리 백문씨.
집안에 문제가 있을 때 남자들보다 더 큰 도량과 혜안으로 대처하는 며느리의 역량을 시아버지는 진즉 알아보았다. 아들을 제치고 가업과 가문을 책임지는 가장의 지위를 며느리에게 물려준 그양반도 참 대단하다.
결국 이 대담한 여장부는 물귀신처럼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시아주버니의 방해공작에 맞서며 차압당한 백초청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가업의 秘方을 눈독 들이는 세력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백초청을 인수한 사람들에게 '브랜드'에 대한 지분을 대차게 요구하고 나선다. 황실에 줄을 대기 위해 아낌없이 재산을 털어 내관에게 집을 사주기도 하고, 식구들 끼니는 줄일지언정 백초청을 다시 열 날에 대비하여 일꺼리도 못 주는 백초청 약사들을 몇 년씩 거두는 등 손 크기가 장영자 여사 저리가라다.
특히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닳게 만드는 건 그녀의 활약상, 즉 황실의 집안싸움에 억울하게 휘말려 사형선고를 받게 된 시아주버니를 대담한 방법으로 구해내(시체 바꿔치기 수법) 남모르게 수십 년간 뒷바라지하는 대목이다. 손도 크고 간도 크지만 품마저 넓은 그녀....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 살아봐야 하는데..... ^^
백문씨 역을 맡은 배우는 斯金高娃. 내가 상하이에 있을 때부터 TV로 자주 보았던 정상급 연기파 배우다.
극 속의 백문씨는 쓰진까오와 여사의 연기를 통해 멋지게 되살아났다.
작은아버지 백영우역을 맡은 劉覇琦의 느물느물한 연기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평생을 거짓말과 음해와 편법으로 살아온 이 악역은 막판에 목숨을 건 한껀으로 시청자들을 울려버린다.
눈물이 적은 나도 하마터면 찔끔 할 뻔했다. 류파이치의 연기 덕분이다.
중국 드라마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전형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좀 노골적이긴 하지만..^^)
왕후장상 얘기가 아니라 私家의 일대기가 소재라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는 모습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돈 있고 힘있는 인물과의 꽌시를 만들기 위해 충성을 다 바치고 굴욕과 비루함을 마다 하지 않는 인내심,
문제 해결을 위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돈을 갖다 바치고....
꽌시를 만들고 나면 일가 친척들이 다 빈대붙어서 팔자 고치려고 하고, ....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그들은 잔머리를 굴리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때론 번개같이 움직인다.
하긴 이게 뭐 중국 만의 얘기랴. 요즘 한국사회의 인간관계 역시 그 못지 않게 노골적인 듯....
어쨌든 중국에 사업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곡 봐야 하는 작품으로 추천할 만하다.
감독인 곽보청은 이 드라마의 모델이 된 락씨일가에 입양된 (극중 백경기의) 양아들이라고 한다.
쿡TV 무협물에는 40회까지밖에 없는데 인터넷 찾아보니 이후 72회까지 대택문 II로 나왔단다.
중국 사는 후배가 서울나들이 나온다길래 그것 좀 찾아봐달라고 했는데 결국 못찾고 빈손으로 나왔다.
아마 뒷편은 항일전쟁의 포연 속에서 백씨약초청을 지켜내고 공산당 정부의 인정을 받아 전국을 망라하는 동인당약방으로 발전해가는 얘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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