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니스가 그리운 것은 꿈처럼 아련한 니스 해변의 바닷빛보다도, 축제 같았던 시위현장보다도, 우아하면서도 다정한 동네 골목보다도......
3박4일을 묵었던 '빌라 쌩 떽쥐뻬리'와 룸메이트 Ebba 때문일 것이다.
숙소 예약을 하면서 이름이 참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몰랐다. 쎄인트 엑쉬페리?
게다가 15분마다 운행한다는 셔틀을 못찾고 20여 분 언덕길을 10킬로 넘는 배낭에 눌린 채 걸어올라올 때만 해도 (승합차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승용차였다!)
이노무 숙소, 여차하면 옮겨야겠다고 씩씩댔건만....
짐을 내려놓은 뒤 세 시간 만에 그만 '쎙 떽취뻬리의 집'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backpacker's heaven이라는 구호가 무색하지 않은 이 호스텔에는 웬지 낯선 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만들어주는 달콤한 공기가 있다.
게다가 장난감 같은 주택가와 니스 시내까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전망, 호텔급 호스텔이라는 찬사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합리적인 시설,
가격 대비 감동인 chef's dinner와 free breakfast, 음악과 대화가 흐르는 라운지와 별빛이 흐르는 앞뜰......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랑스러운 Ebba가 있었다.
파란 커버 씌운 배낭 기댄 침대가 내 꺼. 파란 백 올려진 침대가 에바 꺼.
13인실로 알고 갔는데 두 칸으로 나뉘어 8인실처럼 사용하게 해둔 방이다.
13인실에 딸린 욕실에 샤워부스가 다섯 개나 된다.
대부분 호스텔에서는 엄두도 못내는 널찍한 세면대 겸 화장대까지 있다. 게다가 화장실은 별도.
free breakfast에 free internet인데 숙박비까지 너무 착하다. 16유로.
결점이라면 딱 한 가지. 시내에서 멀지는 않은데 교통이 좀 불편하다는 것.
컴퓨터가 12대였나? 공짜 인터넷에 자리도 넉넉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글을 타자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다.
그나마 읽기는 가능하니 한글로 읽고 영어로 쓰면 된다.
이 호스텔의 또다른 감동, 식당과 주방 규모가 웬만한 호텔급이다.
여기는 요리사 구역.
5~6 유로 정도 내고 요리사가 제공하는 훌륭한 디너를 즐기든지
숙박자들을 위한 조리구역에서 직접 해먹으면 된다.
제대로 된 조리기구 및 그릇들과 오일, 소금, 케첩 등 기본 양념까지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다.
아마도 연어스테이크를 주문했던 것 같다. 야채도 풍성하고 맛도 끝내줬다.
사용한 그릇과 도구들을 설겆이해서 정해진 자리에 정리정돈만 해두면 된다.
아침식사로 제공되는 시리얼 팟의 버라이어티 쇼!
알아서 해먹으라고 대형 토스터와 식빵과 잼, 버터도 제공되고 커피, 주스, 우유, 시리얼 등등은 무한리필.
나는 5유로 정도면 acceptable이라고 보고 저녁식사만은 주방장이 해주는 풍성한 '프랑스(!)' 요리를 즐길 생각이었는데
짠순이 에바가 만날 '삐갸르'에서 사온 냉동식품만 데워먹는 바람에 덩달아 출입하기 시작했고
물가 비싼 동네(빠리)에서는 이곳 덕을 톡톡이 보았다.
스쿠바, 스노클링, 카 누, 제트스키 등 이 호스텔에서 연결해주는 레포츠 패키지가 많기 때문에 낮에는 뿔뿔이 흩어져 놀던 사람들이
밤이면 이 앞뜰로 나와 별을 보며 얘기꽃을 피운다. 주로 흡연족들이다.
브라질 뮤지션 안젤로, '삼바 플라멩고'라는 장르를 개척한 작곡가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넉 달째 유럽을 여행중인데 거리공연으로 여행비용을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니스에 온 지는 일주일 됐고 지난 주말에 이 호스텔에서 첫 공연을 했단다.
이 호스텔에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거나 음악, 춤 등 퍼포먼스를 하면 무료로 슉박하게 해준단다.
안젤로뿐 아니라 에바가 소개해준 스웨덴 할머니 한 분도 자기 동네에서 알아주는 화가라는데, 역시 이 호스텔에 그림을 한 점 걸어주고 두 주일째 묵고 있다고 했다.
안젤로는 영어를 못해서 친구가 없다며, 그것도 스페인어라고 나불거리는 내게 과하게 친한 척을 하는데다가
어설픈 내 스페인어와 그의 어설픈 영어가 어울리니 꼭 덤 앤 더머가 된 기분이라 이래저래 불편해서 은근히 피해다녔다.
하지만 담배 피우러 나올 때마다 마주쳐서 자꾸 말을 섞게 되어 약간 부담스러웠던 인물.
하루만 더 있다가 자기 공연 보고 가야 한다고 붙잡더니, 결국 떠나는 내게 'Adios'라는 인사 대신 'Asta la vista'(다시 만날 때까지...)라고 하라고 빡빡 우기더라고.
룸 메이트 에바 블롬버그.
나이는 서른이라는데 표정은 중학생이다.
어디서 맛을 봤는지 신기하게도 김치비빔밥 열광팬인 스웨덴 아가씨.
게다가 스웨덴 사람 치고 엄청 수다스럽다. 스웨덴 사람들은 대개 조용한데 넌 왜 그리 시끄러우냐 하니까
자기는 벨기에에서 주로 컸고 스페인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은 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스웨덴 사람이라기보다 유럽사람이란다.
지금 이 계절에 스웨덴에 있으면 너무나 춥고 우울하기 때문에 태양이 넘치는 니스에 머물고 있단다.
니스에는 친척들도 몇 있고 아빠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별장을 리모델링하고 있다는데 거길 두고 왜 호스텔에서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낮에는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후쯤 삐갸르에서 냉동식품을 사들고 들어와 함께 해먹자고 나 올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나 역시 이 종달새 같은 아가씨와 냉동식품 데워먹으며 수다떠는 맛에 매일 저녁을 기다리곤 했다.
노르웨이가 유럽에서 제일 부자라, 스웨덴 애들은 노르웨이로 일하러 가고 노르웨이 애들은 스웨덴에 쇼핑하러 온다는 둥,
스웨덴 공주가 개인 트레이너와 사랑에 빠졌지만 왕과 왕비의 반대 때문에 7년을 기다린 결과 최근에 뜻을 이루었다는 둥,
까십성 화제들이 주를 이루다가 가끔은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경영과 미술사, 학위를 두 개나 땄지만 적당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내던질 무언가를 찾지 못해 힘들다고도 하고......
너무 개인주의적이어서 실례가 될까봐 눈도 잘 안 마주치는 스웨덴 사회가 싫다고도 하고....,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복지정책이 오히려 노인들에게 신경을 안 쓰게 하고 (국가가 봐주니까) 어린애들은 독립심 길러준다고 너무 일찍 기숙사에 맡겨버리게 해서
사회가 너무 냉랭하단다. 자기는 열 두 살에 기숙사생활을 시작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당했다나.
한번은 나가서 한 잔 사겠다고 하더니 가족 이야기를 꺼낸다.
미술관 큐레이터인 엄마와 회계사인 아빠는 불같이 사랑한 나머지 이혼과 결혼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갈라섰단다.
그 세월 동안 마음에 큰 의지가 되었던 오빠까지 교통사고로 잃었고 그로 인해 외롭고 상처많은 10대를 보내야 했다고,
술과 담배, 커피로만 연명하며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했다.
자기도 엄마처럼 사랑에 중독되어 살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 전철을 밟기 시작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사랑 같은 거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sun-crazy boy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몇 년째 열애중이다.
스웨덴 사람이, 게다가 유난히 짠순이인 에바가 코로나 맥주까지 사며 오버하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오다가다 만나 고작 세 밤을 함께 지낸 사이에 무슨 그런 속 깊은 얘길 털어놓나 싶은게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스쳐가는 사이라서, 그리고 나이차도 있고 다른 문화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서 더 속내를 쉽게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나도 반가울 것 같은 친구라 상하이로 놀러오라고 연락처를 주었다.
동양에 대해 호기심이 많던 그녀, 특히 미얀마에 관심이 많길래 내 블러그를 열어 무무네 고향에서 찍은 카렌족 설날 잔치를 보여주니 완전히 열광하던 그녀.
구식 혼례복을 입은 한쌍의 신랑신부 점토인형 하나 주니 아주 좋아죽던 그녀......
드물게 순수하고 귀엽던 그녀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만일 우리가 상하이에 계속 살았으면 분명히 에바가 한번 다녀갔을 것이다. 너무나 중국에 오고 싶어 했고 여행도 비교적 쉽게 하는 아이니까.
Hi Jongmin !!
I´ve told my mother about the very cool and interesting Korean woman I meet at the hostel.
I immediately began to rearrange her apartment to make it less crowded (I also easily get claustrophobic).
Now I´m suppose to be looking for a job, but I don´t really know where to begin since I don´t know what I want to do.
사실 에바만큼이나 다시 보고싶은 친구들이 있다.
남미여행할 때 만났던, 샤모니의 레베카, 베를린 사는 로니, 파리에서 일하는 파비오(이 친구는 진짜로 반가워할지 확신이 안 선다. ㅎㅎ)
필리핀 여행에서 만났던 조셉, 하롱베이에서 만났던 말레이시아계 호주아줌마 산타....
모두 헤어질 때 많이 아쉬웠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누었고, 헤어진 뒤에도 메일을 주었던 친구들이었지만 내 게으름으로 시간의 간격을 너무 많이 벌려놓았다.
(모국어로도 쓰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데 영어로, 그것도 말하는 것도 아닌 쓰기라는게 내겐 숙제처럼 느껴졌던 거다.)
이젠 메일 쓰기도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멀어졌으니 하물며 유럽땅 밟았다고 만나자 하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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