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地芚山房

오늘은 푸른 하늘

張萬玉 2011. 7. 18. 08:45

장마철에 들어서며 한꺼번에 너무 많은 부음을 들었다.

 

첫 소식은 온라인에서,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분의 아주 뒤늦은 소식이었으니 잠깐의 애도로써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부음이었겠으나

몇 주일이 지나도록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내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동맥 내 항암주사와 토모킬러 요법에 대해 검색하다가 찾아낸 블러그 http://blog.daum.net/tobitech 의 쥔장.

Tobitech라는 닉네임으로밖에 모르는 그는 2008년 2월 직장암에서 시작하여 간과 폐 전이를 거치면서 치료과정에서 박사가 다 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블러그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 것은 그의 해박한 의학지식 만이 아니었다.

침착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나간 자신의 투병과정, 대형병원 표준치료에서 ‘버려진’ 환자들의 치료현실 고발 등등에 대한 공감도 공감이려니와

읽어가면 갈수록 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Tobitech라는 인물' 자체 .....

 

학구적이고 냉철하고 성질 급한 내 나이 또래의 공학박사 출신 CEO....

현대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첨단(표적치료, 면역치료 등) 치료에 엄청난 비용과 체력을 쏟아부었던 그는 그토록 대단한 투지와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신창이의 몸이 되어 3년여에 걸친 ‘암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만다.

‘암과 싸우지 말라’는 사람들이 볼 때 그의 전쟁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몸짓이나 다름없는 무모함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암과 싸우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완치가 불가능한 4기암, 말기암 환자들 입장에서는 결국 치료 포기나 다름없는 선택일 뿐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의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 명을 앞당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앞에 연민과 존경의 마음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고방식이나 성정 등등 여러 측면에서 내 남편과 흡사한 점이 많았기에.... 그의 전쟁에 너무 몰입했던 것일까.

심지어 컴퓨터 앞을 떠나 있을 때조차도 그가 겪었던 몸과 마음의 아픔들이 마치 전이라도 된 양 질기게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닐 정도였는데..

 

12월 23일의 마지막 포스팅 이후가 궁금해져서 그가 활동하던 까페를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그가 2011년 4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회원들이 올린 댓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암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해서 가입했던 까페들이었기에 필요한 정보를 찾느라고 눈팅만 했지 개별 회원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는

비로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읽을 만한 글을 올리던 회원들의 마지막 포스팅 날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부음은 신문 부고란을 통해 왔다.

3주 전 에덴요양병원으로 찾아가 수박도 나눠먹고 병원 앞뜰에서 함께 산책도 했던 분이었기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분은 작년 6월에 간으로 전이된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고 3차례 정도 항암치료를 하다가

항암치료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연치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보려고 에덴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석 달 정도 식이요법과 운동에 전념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암이 계속 커져 결국 비표준 치료인 동맥 내 항암과 토모킬러 치료를 30회 받으셨고 그 결과 원발암은 거의 없어졌지만 폐와 복막 쪽으로 전이.

우리가 만났을 당시엔 복막 내 항암치료를 한 차례 받은 뒤였는데 복수가 차고 황달이 오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셨지만

이 증세만 이겨내고 나면 다시 한번 복막 내 항암을 해서 깨끗하게 만들겠다고,

우리에게도 체력이 그만할 때 좀더 공격적인 치료로 암의 기세를 어느정도 꺾어놔야 하지 않겠냐는 권유까지 하실 정도로 투병의지가 넘치셨는데....

 

세 번째 부음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소식이었다.

남편 후임으로 중국회사를 맡으셨다가 작년 3월에 담도암으로 돌아가신 분의 친구분이자 남편의 대학 선배인데,

담도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친구 병문안을 왔다가 혹시나 해서 받아본 건강검진에서 폐암 4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갑작스럽게 투병생활을 하게 된 분이다.

남편과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연락하고 지내는 정도의 친분이었지만 암 투병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전보다 전화로나마 자주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그 분도 수술이 불가한 4기암이다 보니 항암치료를 12회 넘게 받으셨고 산도 열심히 타신다고 하셨다.

 

그 분에겐 남들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막내아들이었다.

늘 짬을 내어 운동도 함께 하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들의 뒷바라지도 직접 챙기셨고 

특히 퇴직 후에는 아들이 내게 준 숙제라며 사회복지 대학원 과정까지 하실 정도로 장애아들의 문제에 열성을 보이셨던 분이다.

암 투병 중에도 아들 때문에라도 꼭 낫고 말겠다던 그 분이 병석에 눕게 된 것은

꽤 양호하게 보였던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올해 초.... 아들의 유럽연주여행에 동행하신 뒤였다.

워낙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의사로부터 허락도 받았던 여행이었지만 과로하셨던 것일까.

여행 후 신장에서, 원발암이었는지 전이된 건지 불분명한 암세포가 발견되어 수술을 했고 그 후로 말기 상태에 들어가신 모양이다.

 

당연히 남편 쪽으로 부음이 들어왔을 관계이지만, 그분 부인이 나의 대학선배였던 인연으로

내 동창회에서 보낸 메시지가 내 휴대폰으로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남편 쪽에서는 투병중인 남편에게 충격을 줄까봐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어차피 알게 될 일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알려줬더니 당장 영안실에 가자고 나선다.

 

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삶과 죽음의 의의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이미 몇 차례나 나누었건만 아직도 난 준비가 안 됐다는 걸... 이런 기회에 아프게 확인한다.

그러나 남편도, 그리고 영안실에서 만난 가족들도 의외로 담담하여 충격에 휩싸였던 내 마음이 오히려 평안을 얻고 돌아왔다.

부인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얼마나 더 사느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루하루를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게 사느냐라고... 옆에 있는 사람이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아마 가신 분도 그런 소신으로 아들의 연주여행에 동행하셨던 것 아니었을까.

 

(전략)

그동안 투병생활을 비교적 편안하게 해올 수 있었던 데는 ‘마음 편히 먹어야 한다’는 치료차원(!)의 애매모호한 명제에 안주해왔던 측면이 있었다.

항암치료 6개월이나 경과했건만 암 환우 까페의 게시판을 달구는 ‘항암부작용’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로서는

앞날은 모르는 게 오히려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 생각은 옳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주관적인 자기암시와 현실을 인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마음, 어떤 것이 더 마음을 편하게 해줄까?

(토비테크의 글 중에서 발췌요약)

 

 

마지막 소식이다. 신문기사에서 보았다.

같은 환우의 죽음은 아니지만 워낙 죽음 자체도 충격적인 데다가 

그녀의 처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동안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외로웠던 걸까.

게다가... 그녀를 외롭게 할 수밖에 없었던 착한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프다.

정말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이 아닐까 한다.

엉켜버린 금생의 인연을 정리하고 다음생으로 먼저 가버린 그녀...

부디 극락왕생하시라. 

 

그리고 Tobitech씨, 박경호 선배님, 유상덕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하세요.

 

 

오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장마가 있으니 태양이 더 빛나는 것이겠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는 태양에게....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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