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프리카

아프리카 종단여행 8 - 마사이 마라 2

張萬玉 2014. 10. 2. 15:06

 

이튿날은 마라 강으로 갔다. 가까운 줄 알았는데 길이 좋지 않아 편도 네 시간이나 걸렸다.

 

도보로 강을 따라가는 코스라서 혹시 강에서 튀어나올 악어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총 든 가이드가 동행하는데

가이드 말로는 한번도 그 총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잔잔한 강에는 하마가 있고 코뿔소가 있고......

그리고 악어가 있다(고 한다. 물 속에 잠겨 있어서 한 마리도 못 봤다)

,

엊그제 비가 몹시 내린 탓이라고 했다.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익사해버린 루의 시체들...... 차마 정시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센 물살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악어의 공격.

혹시 래 전 M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기억나시는지. 

악어는 한번 물었다 하면 물속으로 끌고들어가 익사할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데, 대여섯 시간을 버티며 악어와 사투를 벌인 끝에 살아난 녀석이 있었다.

기진맥진 걸레쪽처럼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이끌고 뭍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이미 녀석의 무리들은 모두 강을 건너간 뒤.

악어와의 싸움을 이겨냈지만 무리를 잃은 녀석은 죽을힘을 다해 숲을 헤메다 결국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악어와 싸우고 물살과 싸워 이겨낸 녀석들은 이제 마사이마라 초원에서 주린배를 채운 뒤에 일제히 출산을 하여 잃어버린 개체수만큼 다시 보충을 할 것이다.

(맹수들이 노리는 게 주로 새끼들이기 때문에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아예 시기를 맞춰 대량으로 출산하는 것이 루떼의 생존전략이라고 한다)

 

 

유치원생들과 중학생들이 견학을 나왔다. 학교 이름으로 미루어보니 모두 미션스쿨인 듯 했다.

단정하게 교복들을 차려 입고 예의바르게 인사도 잘한다.

 

점심으로 준비해간 샌드위치를 먹는데 원숭이떼와 새떼가 마구 몰려온다.

 

아, 이 화장실 정말......

깨끗하긴 한데 도무지 어떻게 사용하라는 건지 난감하다. 저 높은 데 걸터앉으라는 건지 올라가서 쪼그리고 앉으라는 건지.....

예전에 중국 살 때 촌에서 올라와 양변기를 처음 써본 아가씨가 했던 질문이다.

그 아가씨는 올라가서 쪼그리고 앉는 쪽을 택했는데 너무 위험하더라고 불평..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은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선(돌에 쓰인 T와 K사이)

 

캠프로 다시 돌아온 것은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저녁먹을 때까지 잠시 짬이 나길래 우리 캠프 경비원으로 일하는 마사이족 마을을 구경가기로 했다.

바가지 옴팡 씌운다는 썰이 있어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가지든 다라이든 지금 아니면 언제 마사이족들에게 당해보겠나 싶어 즐거이 따라나섰다.

 

우리 텐트 담당 경비원 무시야씨. 49세.부인이 둘이고 자식은 일곱이며 두 집 살림을 한다.

부인이 더 필요하면 소 열 마리를 내고 데려오면 되는데 자기는 더 이상 부인은 필요없단다.(마치 부인을 세간살이처럼 여기는 느낌.. ㅎㅎ)

마사이족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일정 기간 동안 bush(마을의 경계가 되는 숲지대)에서 망보는 일을 맡게 되는데

이때 사자를 죽이게 되면 마을의 리더가 된다고 한다. 무시야씨는 세 마리를 죽였는데 마지막으로 죽인 것이 2005년이라고 한다.

사실 사자를 봤다고 막 죽이면 안 되고, 자기 가축들을 공격할 때만 죽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냥도 마찬가지. 생계를 위한 사냥은 불법이라고.

 

마을에 들어서자 청년들이 대열을 갖추더니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다. 이게 널리 알려진 '마사이 댄스'라는 건가 보다.

높이 뛰기는 하는데 3분도 채 안 걸렸다. 그리고 무슨 불 피우기 시범 같은 거 조금 하더니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쇠똥과 진흙으로 단단하게 막아서인지 빛이 한 점도 안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그릇 몇 개가 발에 채인다.

어둠이 눈에 익은 뒤 둘러보니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부엌,정확히 말하자면 주전자 얹힌 화덕이 눈에 들어오고

한쪽 구석에 천으로 가린 곳이 부부가 쓰는 침실인 모양인데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안 보인다기 보다 아무 것도 없다는 쪽이 맞겠다.

여기서 어떻게들 사는 거지? 여기서 사는 거 진짜 맞나? 돈벌이용 세트장 아냐?

들어간 지 3분도 채 안 됐는데 그만들 나오란다. 뭘 보여주고 소개하고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리고는 바로 뒷뜰로 데려가서 기념품 사란다. 뭘 물어봐도 대답조차 안 해준다. 얼렁 기념품이나 사고 가란 거지.

마사이족에겐 돈이 필요 없다고 누가 그랬나. 손님맞이까지는 안 바라지만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너무 노골적인 돈벌이.

돈벌이에도 요령이 필요한 거다. 나쁜 입소문에 의해 외면 당하는 건 순간인데, 모르는 걸까?

 

어쨌든 요 예쁜이의 똘망똘망한 영어를 기특해하며 팔찌 몇 개 사줬다.

이 마을에도 TV가 나오고 인터넷이 들어왔으니 이 소녀도 갖고 싶은 게 많을 것이다. 마사이라고 우유와 소피만 먹고 살 수 있겠나.

우쒸, 다 이해하는데...... 왜 기분이 드러운 거지?

뭘 해줬다고 순식간에 800실링(10달러)이나 뜯어가고 말이야~

보통은 마실 가듯 가서 춤 봤으면 팁을 주고 공예품이 웬만하면 좀 사주고 그러는 게 관례인데... '마사이족' 이름값을 하느라고 그러는 건가 싶다.

 

사진은 맘대로 찍으라고 했는데 우린 그런 거 모른다면서 개별적으로 사진값을 요구하는 아지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탕 달라고 조르고....

문명이 얘들을 오히려 가난하게 만들었구나.

 

에공, 저 파리만이라도 좀 어떻게......

 

"Keep Walking!" 이라는 조니워커의 광고가 무색하게, 이제 '조니'들은 계속 걷기를 멈춘 것 같다.

도시행 승합차도 들어오고 오토바이도 휙휙 지나가고...... 가끔은 판자집 앞에 주차된 자가용도 눈에 띄는데 

염소떼 몰고 다니는 거 말고는 뭐 끝없이 걸을 일이 있겠나.

(모여앉아서 카드 치는 마을청년들도 봤다. 마사이족이 카드 치면 안 된다는 법이야 없지만 뭐랄까, 환상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모시에서 시장구경을 나갔다가 노천 미용실에서 잠시 잡담을 나누었던 마사이 청년의 얘기.

마사이족에게 귀를 뚫거나(마사이족의 귀뚫이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다) 앞니를 뽑거나 얼굴에 흉터를 내는 건 전사부족 후예라는 중요한 징표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도시로 나가게 되면 그때문에 무시를 당할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절대 자기 몸에 어떤 칼자국도 내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자기를 아버지는 겁쟁이라고 매질도 하고 걱정도 했지만 끝끝내 버텼다고, 그것이 훨씬 더 용감한 행동 아니냐고 했다.

마사이족들도 지금 격렬한 세대간 격차의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삶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물!

강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일이 생활에서 가장 고달픈 일 아닐까 싶다.

 

서늘한 바람, 빗기 섞인 황토 냄새, 소방울 소리, 서서이 드리우는 땅거미를 배경으로 선명하게 찍히는 마사이 컬러.

숙소로 돌아오는 마음이 자못 감상적이 된다.

중앙정부로 진출한 마사이 출신 지도자들은 자기 부족들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부족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저 친구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저 친구들이나 우리나 오늘 종일 흙먼지 쓰고 돌아다녔다. 우리는 온수샤워 뒤집어쓰고 푹신한 침대로 들어갈 수 있지. 하지만 저 친구들은?

사자도 때려잡는다는 용맹한 마사이들인데...... 가끔은 깨끗한 물이 펑펑 나오는 우리 캠프를 접수해버리고 싶지 않을까......

 

 

셋째날은 해 뜨기 전에 초원으로 나갔다. 그 시간이 동물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시간이란다.

사실 앞서 올린 사진들 중 대부분이 이날 새벽에 찍은 것들이다.

내내 날이 흐려서 멋진 일몰이나 일출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아침빛은 신선하다.

 

아침 먹고 돌아가는 길에 마사이들이 진짜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갔다.

이제는 쇠똥과 진흙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함석과 시멘트 블럭으로 지은 집에서 산다고 한다.

조촐하지만 '호텔' 간판도 붙어 있고 공구 가게, 휘발유 가게, 잡화점, 심지어 은행까지 눈에 띈다.

아이들은 길가에 앉아 오가는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사탕을 기다리고......

(우리 기사는 아이들이 사탕 받아먹는 맛에 학교에도 안 가려고 한다고 관광객들이 사탕 좀 안 줬으면 했다.) 

 

 

나미비아에서 터키까지 개조한 차량으로 여행중인 터키인 커플.

네 살배기 아들과 일곱살 딸 하나, 네 식구가 즐거워보였다. 비록 운행중에 말썽이 난 바퀴 수리중이었지만......

 

우리 차 운전기사 제임스. 근데 그건 영어 이름이고 케냐 이름은 제모란다.

제모가 한국말로 무슨 뜻인지 보여주고 있는 장여사. 참 얼굴 두껍네. ㅋ

 

돌아오는 길에 운좋게도 조수석이 내 차지가 되었다.

관광차 운전기사들이 장착하고 있기 마련인 립서비스는커녕 미소조차도 인색하여 갈 때는 몇 마디 붙여보지도 못했는데

알고보니 원래 낯을 가리고 성격이 과묵해서 그런 것일 뿐, 이 양반도 얘기하길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제임스 얘기 듣느라고 그 먼길 지루한 줄도 몰랐지만 그보다도 그의 신상 얘기를 통해 아프리카 요즘 세대들 삶의 일단을 볼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케냐의 다수 부족(50%)인 키쿠유족인 그는 수도 나이로비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남이다.

개신교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대학에서는 컴퓨터를 전공했으나 

마땅히 좋은 직장을  찾지 못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택시운전사가 되었다고 한다.

운전 경력 15년차. 좀더 수입을 위해 이 일을 시작한 건 5년째.

나이는 40인데 결혼한 지는 3년째이고 아들이 하나 있고 부인은 컴퓨터 엔지니어.

아프리카 사람들은 일찍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물으니 웬만큼 성공한 뒤에 하려고 미루다 보니 늦었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으로 결혼을 미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사정 역시 글로벌한 현상?

이제는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단다.

취미는 그림 그리기(색연필화)와 마라톤. 친구들은 대부분 축구를 하지만 자기는 혼자 달리는 게 좋아서 일 나가지 않을 때는 10킬로 이상씩 달린다.

정치나 다른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한국에 대해서도 이름밖에 몰랐는데 나랑 얘기하면서 관심이 생겼다니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