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애월리 四季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이

張萬玉 2015. 7. 19. 08:05

보는 이에게는 유유자적 고품격 라이프일지 모르지만 초보자들에게는 전쟁이다.

그러나 굳은살을 훈장으로 여기고 때론 납작 엎드리면서 배워가는 인생의 지혜는 지금까지 접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깨달음이다.

느릿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실은 격렬하고도 근본적인 다이나믹 속에 보내는 하루하루.

타성에 젖어버린 몸과 마음이 그 귀한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자연의 속도에 길들어가는 듯 하다. 어쨌든 삶은 지속된다.

 

# 살충소동

 

7월 들어 기승을 부리깔따구(까맣고 좁쌀만한 모기, 순식간에 시원찮은 공격을 퍼부어대는..) 무서워 한참을 밭에 안 나가던 어느날

드디어 앞집 할배의 방문을 받았다.

앞집과 사이에 있는 담 주변의 잡풀 좀 뽑으란다. 벌레도 벌레지만 씨가 날려서 자기 집 밭까지 넘어온다고......

내 밭이야 태평농법을 구사하면 그만이지만 남의 밭에 영향을 준다니 땡볕 아래 검질이라고 거부할 수가 없네.

검질이야 하면 되지만, 그 전에 일단 깔따구들부터 처치해야......

일단 지니네가 뿌렸다는 텃밭용 모기약부터 사러 애월농협에 갔더니 

모기약 같은 건 안 판다면서 농삿일에 모기 물리는 건 기본 아니냔다. 헐~

혹시나 해서 다시 한림농협에 갔더니 그건 축사용 모기약이라고 명월리 동물병원에 가보란다. 

 

 

반나절을 돌아다닌 끝에 구입한 축사용 모기약 '사이퍼킬'과 3L짜리 분무기.

농사 제대로 지으시는 분은 장난감 사왔냐고 웃으시겠지만, 20L 짜리는 너무 무겁고... 어차피 제초제나 농약 안 뿌릴 건데 뭐. 

 

3리터들이 분무기에 30ml씩 희석해가지고 담장 주변과 뒷뜰 등 잡풀 무성한 곳에 두 통을 뿌리는데

생각보다 빡세다. 어깨에 멘 통은 별거 아닌데 한쪽 팔로 계속 펌프질 하는 게....

뿌리고 나니 신기하게도 깔따구들이 감쪽같이 없어지긴 했다.

하지만 사흘 뒤  태풍 찬홈이 폭우를 몰고 왔으니.....한번 뿌리면 2~3주는 간다는 효과를 겨우 사흘 봤네.

다시 날 받아 뿌려야 하는데 며칠 째 주문만 외우고 있다. 내일 아침엔 꼭 뿌려야지... ㅠ.ㅠ

 

 

# 세우고 또 세우고

 

제주의 바람은 톱 연주 소리를 낸다. 설상가상 촌집에서는 낡은 창문들까지 덜컹덜컹 박자를 맞춘다.

밤새 천지를 흔들던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틈에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애지중지하던 토마토 두 그루가 사지를 뻗고 누워있다.

지주대를 세운다고 세웠건만 밭이 기본적으로 암반이라 사실은 짝발 짚고 서 있는 형국이었고

초보 농사꾼답게 순 질러야 할 때 제대로 안 해주고 떼어주는 척만 했더니 (토마토 아야야 할까봐....ㅋ)

사방팔방으로 가지가 뻗어나가며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아 아예 땅으로 기어다닐 지경이었는데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다고 비바람이 따귀 한번 때리니 지주대들 모두 45도로 기울어버린 거다.

지주대를 뽑아 완전히 다시 세워야겠는데 작은 장도리 휘둘러봐야 깊이 박히지도 않을 테고... 이 총체적 난국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던 중.

서울에서 친구 둘이 놀러왔다. 하나는 어릴 적 농사꾼, 또하나는 텃밭 좀 해본 친구.

 

솜씨 좋은 이 친구들이 한나절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정글을 방불케 했던 토마토밭은 물론

모자라는 지주대에 구차하게 엮어뒀다 역시 태풍에게 따귀를 맞아 제갈길을 못 찾고 있는 고추밭까지 싹 정리해줬다.

 

 

사흘간의 폭우가 지나간 뒤 여기저기서 옥수수대가 부러졌네 해바라기가 쓰러졌네 심지어 돌담이 무너졌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하지만 대자연의 위력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의연하게 다시 세우고 다시 심는다.

돌아보니, 모종이고 씨앗이고 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파릇파릇 싹이 날 때 쉽게 기뻐하고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적절한 때에 솎아줘야 하고 지지대 장만해줘야 하고 물 챙겨줘야 하고 벌레 잡아줘야 하고 잡초 뽑아줘야 하고......

그렇게 성의를 다 바쳐도 병이 돌거나 비바람이 몰아쳐 한방에 훅 가버리는 경우가 다반사 아닌가.

그러한 우여곡절을 묵묵히 다 거치며 결국 탐스럽고 건강한 작물들을 키워내는 농군님들께 새삼 존경을!

 

 

# 심고 뽑고, 맞이하고 보내고

 

추운 겨울을 견디며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싱싱한 잎을 내주던 상추가 명을 다했는지 갑자기 징그러운 뿌리를 드러내면서 꽃 피울 준비를 한다. 

여릿여릿하던 연두빛 잎사귀들도 짙은 녹색으로 변하며 뻣뻣해졌다. 아쉽지만 여기서 이별을 고하고 새 인연을 준비해야겠다.

비바람에 기린 목처럼 늘어져버린 아욱도, 어느새 꽃을 피운 돌미나리와 방풍나물도 이제 안녕.

올해 초 나의 집중적인 호미질 공격을 받았던 괭이나물을 대신해 빈 밭을 점령해버린 쇠비름도 모조리 훑어내야 하고 

맹렬한 기세로 번지다가 흉물로 변해버린 애플민트도, 차조기도 어성초도 조릿대도 언제 날 잡아 모조리 목을 쳐야한다.

너무나 기름진 우리 텃밭에서 생명을 거두는 일은 오히려 미덕이 되는구나. ㅠ.ㅠ 

 

밭에서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었던 나의 바램을 뒤로 하고 비바람에 떨어진 초록색 토마토들.

피클이나 담으려고 거둬놨더니 이틀 만에 먹음직하게 익어버렸다.

 

내 애간장을 태우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뒷뜰을 찾아오던 냥이 가족들이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요 며칠 친구들이 와서 앞뒤뜰이 떠들썩했는데 그게 위협이 되었던 걸까?

혹시 비명횡사? (길냥이에게 죽음에 대한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지.. ㅠ.ㅠ)

녀석들이 뒹굴던 무화과 나무 뒤쪽에서 좀처럼 떠나질 못하는 어리석은 나의 시선이여.

어차피 집 안에 들일 생각도 아니면서 기별도 없이 떠나갔다고 서운해하는 건  대체 뭐냐고.

 

자연 속에서 살게 되면 도시에서 살 때보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을 훨씬 더 자주, 훨씬 더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당연히 삶의 껍데기는 발라내지고 삶의 속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연의 가르침 속에 거하는 한 인생을 보는 내 눈은 점점 더 밝아질 것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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