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체크아웃 시간까지 여유가 있길래 오랜만에 룸메이트들과 잡담.
어제 코로이코에서 죽음의 레이스를 펼쳤던 꽁지머리의 무용담, 그리고 독일/콜롬비아 커플의 러브스토리....
독일 아가씨는 1년째 여행중이고 콜롬비아 총각은 6개월째 여행중.... 즉 콜롬비아를 여행하고 있던 독일 아가씨가 문신을 하러 갔다가 문신가게 총각을 꼬여서 함께 콜롬비아를 떠났다는 얘기지.
언제 여행을 마칠 꺼냐고 물으니 "우리의 사랑이 끝나는 날.."이라고 한다.
"돈 떨어지는 날이 아니고?" 반문하니 돈은 벌면서 다니니 문제가 아니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커플은 오후가 되면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오전에는 돈 벌 궁리로 바쁘다. 여자애는 남자애로부터 문신을 배우고 남자애는 여자애로부터 영어 배우고... 그러다 눈 마주치면 뽀뽀하고 그래도 지겨우면 저글링 하거나 기타 치거나...
버는 돈이 넉넉지 않으니 다인실을 2인실처럼 사용하여 여러 사람으로부터 눈총을 받는 처지지만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듯 언제나 희희낙낙이다. 그들에게 '오늘'만 있다면 더없이 완벽할 텐데....
그와 저글링만 있으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는 열아홉 살 그녀.
내가 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이십대 초반 아이들은 자신을 완전한 성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짐을 싸면서 포화상태가 된 배낭을 정리했다.
밥 해먹는다고 들고 다니던 올리브유와 커피는 독일/콜롬비아 커플 주고 티셔츠 두 개는 잘 개켜 침대머리에 놔두고 빈 노트 한 권은 카와노에게 주고... 카와노는 내가 비누로 머리 감고 다닌다니까 샘플병에 자기 샴푸를 덜어준다. 밥 얻어먹으려면 그릇이라도 있어야 하니 병 버리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하철 노선도와 보고타 지도도 챙겨주고 뻑뻑한 배낭 자물쇠도 손봐줬다. 본인이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우유니까지 동행하게 될까봐 은근히 신경 썼던 게 살짝 미안해진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빈둥거리다가 리셉션에 배낭 맡겨놓고 시내로 나갔다.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길가 공원 벤치에 앉아 이제부터 밤버스 탈 때까지 뭘 할까, 악기박물관에나 가볼까... 지도를 뒤적이고 있는데 멕시코에서 여행 왔다는 아가씨가 다가와 길을 묻는다. 나도 여행잔데 내게 길을 묻다니..
바쁘지 않은지 내 곁에 눌러앉길래 마침 먹어치워버리고 싶었던 비스켓을 꺼내 하나 먹어보라고 권했다.
몇 마디 오고가는데 웬 건장한 사내가 다가와 "공원에서 음식물을 먹는 건 불법"이라면서 여권을 꺼내보란다.
아니, 저쪽 벤치에 앉은 사람들도 아이스크림 먹고 있는데?
"당신 누군데?"
"나는 경찰이야. 비자에 문제가 없는지 보려는 거니까 얼른 여권 꺼내봐. "
그러더니 황금색 별 모양의 뱃지를 꺼내든다. 그걸 본 멕시칸 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여권을 꺼내 건넨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국경에서 50달러로 해결한 나... 엉겁결에 멕시칸 걸을 따라 여권을 내주는 순간, 아차차! 느낌이 뭔가 수상해.
"이 스탬프, 암만해도 문제있는데....?"
"무슨 문제? 그거 국경에서 볼리비아 오피서가 찍어준 도장이야. 이상하면 거기 연락해봐. "
"암만해도 경찰서 가서 조사 좀 해봐야겠어. 일어나."
"그럼, 너 뱃지 말고 ID카드 보여줘. 그래야 가든지 말든지...."
내가 뻣뻣하게 나가자 그가 뭔가를 꺼내든다. 순간 잽싸게 그 카드를 잡아챘다.(내 돌발행동에 나도 놀랐음)
"자, 너는 내 카드 갖고 있고 나는 네 카드 갖고 있고.... 이제야 공평하군. 여권 봤으면 빨리 돌려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저히 나는 모르겠고 게다가 나는 곧 라파즈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경찰서 갈 수가 없어. 꼭 날 데려가야 한다면 세 명쯤 더 와서 강제로 들고 가야 할껄?"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한참 나를 쳐다보던 그 사내, 대낮에 대로에서 어떻게 해보기에는 그다지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깨달았는지 여권을 다시 들춰보는 척 하더니 돌려준다. 별로 큰 문제 같지는 않으니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는 공공장소에서 음식물 먹지 말란다. 나 참 웃겨서....저 자 경찰 맞아?
그 자가 가고 조금 있다가 멕시칸 걸도 제 갈길 가고....
저녁에 배낭 찾으러가서 호스텔 사람들에게 얘길 했더니 모두 박장대소를 한다. 가짜경찰이 예전엔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은 3인조라네. 헉, 3인조?
그 멕시칸 걸이 바람잡이였던 거다. 경찰을 사칭하는 사내는 확실히 수상했지만, 세상에나....
만일 내가 경찰을 따라나서면 때맞춰 택시가 오고 거기 올라타면 완벽하게 털린다는 거다.
수법에 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어떤 사람은 이런 케이스를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나처럼 바람잡이가 한패인줄을 모르고는 택시에 올라탄 아가씨(바람잡이)를 구해내려고 택시 문을 못 닫게 매달리며 고함을 질렀더니 일당들이 당황해서 가버리더란다. 또 어떤 일본 여자아이는 완전히 털리고도 모자라 청바지까지 뺏기고 속옷 바람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새똥 닦아준다면서 소매치기를 해가거나 사진 찍고 있을 때 손목에 걸린 끈을 잘라내고 채간다는 얘긴 들어봤어도 가짜경찰 얘기는 듣도보도 못했는데, 비자 문제에 발이 저려서 괜히 경찰 따라갔다간 일이 꼬일까봐 무턱대고 버틴 덕을 본 셈이다. 경찰이란 넘이 태도가 어째 좀 미심쩍단 생각은 했지만 멕시칸 걸이 한패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못했는데.... 어이없는 웃음밖에 안 나온다. 사실 내가 좀더 똘똘했다면 관광업 종사자도 아닌 경찰이 영어를 쓰는 것부터 수상하게 여겨야 했을 것이다. 멕시칸 걸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길을 물어보려면 현지인에게 물어보지 왜 여행객이 분명한 내게 물어보냐 말이다.
가짜경찰 소동이 끝난 뒤 얼이 빠져 한참을 거리 공원에 앉아 있다가 악기박물관으로....
이 골목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이 골목에 아기자기한 박물관 네 개가 올망졸망 붙어 있다.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
악기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뻬냐 강습(칠판에 광고)도 해준다. 1회레슨도 가능하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가정집 같은데 상당히 많은 악기들을 소장하고 있는 제법 볼 만한 박물관이다.
악기에 관심이 많다 보니 보이는 것마다 셔터를 눌러댄 모양이다. 궁금하신 분은 플레이버튼 꾸욱~
흐르는 음악은 Chan Chan, 부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Buena Vista Social Club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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