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제주허씨 한달살이

그 섬 5 - 두 갈래 길

張萬玉 2012. 10. 10. 12:19

# 선흘리 그 집

 

친구의 친구라는 인연에 의지해서 불쑥 찾아간 중산간 지역의 그림 같은 집.

마침 기울어가는 태양이 그녀의 넉넉한 정원을 마지막 빛으로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모든 방들을 정남향으로 배치해 햇살을 넉넉이 들이게 한 점,

그리고 그 햇살을 부드럽게 걸러 아련한 실루엣을 만들어주는 소박한 커텐들이었다.  

한 코 한 코,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떴을지도 모르는 레이스, 한 땀 한 땀 피워낸 야생화 자수.       

  

 

방들을 모두 정남향으로 내다 보니 긴 복도가 생겼다.

작은 구석도 놓치지 않는 주인장의 센스가 이 공간을 근사한 전시장 분위기로 가꾸었다. 

 

수필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이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 작업실.

 

황토로 지은 별채까지도 직접 한지를 바르고 공들여 수놓고 염색한 침구들을 오롯이 깔아놓았다. 

'부지런'만 가지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어떤 종류의 열정일까?

정착민 기질이 희박한 나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라 그저 감탄만 연발할 뿐이다.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이곳을 찾기 전에 이미 나는 이 사내에게 반해 있었다.

친구가 건네준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푹 빠져 제주도에 머물렀던 5박6일 동안 도무지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숨죽임 없이 볼 수 없는 그의 작품들, 달빛 아래 흐느끼는 억새, 미친 듯한 노을, 바람, 구름 등등도 그러했지만

가난과 외로움과 싸우며 오직 한 순간의 황홀에 매달렸던 그의 모습이 마치 내 곁에 살아있는 이처럼 나를 격동시켰던 것이다.

솔직이 나는 사진은 잘 모른다. 그러나 무거운 사진장비를 둘러메고 비바람치는 들판을 홀로 헤매는 사내의 허기진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다닌다. 그 바이러스, 참 독하다. 

정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언젠가 제주도에 내려와 깔세 집 하나 얻어서 최소한 제주도의 사계를 만나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분명 이 양반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아마도 아들네미 독립하고 나면?)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이 내 인생의 갈림길일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난 50여 년 쌓아온 인간관계, 재정, 재간, 취향, 지향하는 바 등등을 모두 긁어모아 한 자리에 정성껏 쌓을 것인지.(세상 상식으론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부질없는 것들은 털어버리고 새로움을 갈구하는 나의 열정이 이끄는 대로 과감하게 가볼 것인지.

이럴 기운도 저럴 기운도 거반 사그라져가는 여인50의 중턱에서 

안정된 여인의 둥지와 고독한 사내의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내 양 옆구리 사이로...... 세월이 찬바람처럼 흘러간다.   

 

제주도립미술관

사진도 그렇지만 그림도 마찬가지. 풍경이란 소재가, 자기가 감동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전달하기엔 가장 어려운 소재 아닐까 한다.

하지만 풀어헤친 여인의 머릿결 같은 한라산 능선, 강렬한 몇 번 붓질에 의해 힘찬 여백으로 태어난 정방폭포, 안개에 잠긴 성산봉 등등

제주의 산하가 내 가슴 가득 들어왔다. 이것도 아마 김영갑씨의 영향인지? ㅎㅎ